[뉴테크] 여름엔 시원, 겨울엔 따뜻… 오징어가 낳은 사철용 섬유
갑오징어 모방 카메라, 문어 닮은 약물 패치도
오징어는 뛰어난 위장 능력을 갖고 있다. 피부 색소의 크기를 바꿔 주변 환경과 비슷한 색으로 위장한다. 오징어뿐 아니라 문어, 갑오징어도 같은 두족류 생물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오징어의 위장 능력을 모방해 날씨와 기후 조건에 따라 착용감이 바뀌는 섬유가 개발됐다. 위장은 아니지만 옷을 입은 사람을 보호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결과이다.
알론 고로데츠키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 연구진은 2일 국제 학술지 ‘APL 생물공학’에 “오징어의 피부 색소인 크로마토포어의 작동 원리를 모방해 날씨에 따라 열 투과율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섬유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오징어 같은 두족류 해양동물생물을 모방한 기술들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오징어의 위장기술은 물론, 갑오징어의 카메라 눈, 문어의 접착 빨판을 모방한 연구들이 속속 나왔다. 미국 시장조사 기관인 얼라이드마켓리서치는 생물 모방 소재 시장이 2020년 379억달러(약 49조6892억원)에서 매년 5.7% 증가해 2030년에는 659억달러(약 86조4146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위장용 피부 색소 원리 모방해
육식동물인 오징어는 주로 소형 어류와 새우, 게 같은 갑각류를 사냥한다. 하지만 고래, 상어 같은 대형 어류에게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오징어는 천적을 피하기 위해 먹물을 활용한다. 천적이 접근하면 점성이 강하고 짙은 색의 먹물을 내뿜어 시야를 가린 후 도망간다.
뛰어난 위장 능력도 오징어가 포식자를 피하는 방법이다. 오징어 피부에 있는 크로마토포어 색소는 외부 환경에 따라 배치와 크기가 변하면서 몸통의 색을 바꾼다. 이런 방식으로 마치 군인이 위장 무늬 군복을 입은 것처럼 포식자로부터 몸을 숨긴다. 연구진은 오징어의 피부 색소처럼 섬유 사이에 있는 금속 덩어리를 조절해 외부 환경에 맞춰 적외선 투과율을 바꾸는 섬유 기술을 개발했다. 적외선은 열에너지를 전달한다.
먼저 실리콘 웨이퍼 기판 위에 금속인 구리를 코팅해 나노 구조를 만들었다. 구리층 위에는 고분자 물질인 ‘SEBS’를 발랐다. SEBS는 열 투과율이 우수한 소재로, 주로 플라스틱 제품에 사용한다. 이렇게 만든 구리와 고분자 복합 재료를 웨이퍼에서 떼어낸 후 가느다란 섬유로 만들었다.
연구진이 만든 섬유는 고분자에 구리 입자가 끼어 들어간 ‘금속 섬’ 구조를 나타냈다. 금속 섬은 섬유 표면에 불규칙한 패턴을 만들어 적외선 반사율을 조절할 수 있게 돕는다. 금속 섬의 크기와 패턴에 따라 적외선의 반사율이 바뀌는 방식이다.
구리와 고분자로 만든 섬유는 환경에 따라 금속 섬의 배치가 바뀌면서 적외선의 반사 패턴이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도가 높을 때는 금속 섬이 가까이 뭉치면서 적외선 반사율이 높아지고 투과율은 낮아졌다. 옷을 입은 사람이 방출하는 열 에너지를 차단하거나 통과시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령 착용자의 신체 온도가 오르면 금속 섬이 서로 떨어지면서 적외선을 잘 통과시켜 열을 방출하고, 신체 온도가 떨어지면 금속 섬이 뭉치며 적외선을 반사시켜 체온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연구진은 열 투과율은 금속 섬의 패턴에 따라 최대 10배 차이가 나 온도 변화가 심한 환경에서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로데츠키 교수는 “오징어 피부의 색소가 크기에 따라 가시광선을 투과하는 비율을 조절해 위장 무늬를 만든다면, 이번에 개발한 섬유는 적외선 투과율로 온도를 조절하는 방식”이라며 “온도 조절용 옷감으로 만드는 것 외에도 전자 제품에 쓰이는 전자 섬유, 마찰력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에너지 수확’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징어·갑오징어·문어는 신기술의 보고
오징어 같은 두족류는 생물 모방 신기술의 보고(寶庫)이다. 송영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와 김대형 서울대 교수, 이길주 부산대 교수 공동 연구진은 지난해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Science Robotics)’에 “갑오징어(cuttlefish)의 눈을 모방해 빛 조건에 상관없이 원하는 사물만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카메라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갑오징어 눈동자(동공)는 밤에는 사람처럼 동그랗지만, 빛이 많이 비치는 낮에는 W나 U자 모양이 된다. 동공이 눈의 중심이 아니라 아래쪽에 있어 아래쪽 빛이 더 많이 들어온다. 덕분에 눈부심을 유발하는 위쪽 빛은 차단하고 주로 밑을 지나가는 먹잇감을 더 잘 볼 수 있다.
연구진은 같은 방법으로 구형 렌즈 앞의 조리개를 갑오징어 동공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 카메라를 자율주행차에 장착하면 대낮에 위에서 햇빛이 내리쬐어도 난반사 없이 앞쪽 장애물을 잘 볼 수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성균관대 화학공학부의 방창현 교수와 약대 김기현 교수 연구진은 문어의 빨판을 모방한 약물전달 패치를 지난 2월 ‘미국 화학회 나노(ACS Nano)’지 표지논문으로 발표했다. 패치는 한쪽 면에 지름 3㎜인 흡착 컵들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연구진은 문어 빨판을 모방한 돔형 흡착 컵을 만들었다. 컵을 표면에 대고 누르면 표면의 수분을 옆으로 밀어내지만, 일부는 돌기의 옆을 통해 안쪽으로 올라간다. 그 뒤 컵에서 힘을 빼면 돌기와 물체 사이에 수분이 있던 공간이 비어 진공 상태가 된다. 흡입력이 발생하는 음압 환경이 구현되는 것이다.
패치를 붙이면 피부에 바른 약물이 이전보다 훨씬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흡착 컵이 만든 음압 덕분에 피부 각질층의 구조가 변형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패치의 음압에 의해 각질층 사이에 미세한 공간이 발생하는 것을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약물이 더 깊숙한 곳까지 전달될 수 있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마이클 바틀렛(Michael D. Bartlett) 교수 연구진은 2022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문어가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물체를 감거나 잡는 원리를 모방해 수중 작업용 문어 장갑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문어는 다리 8개에 있는 빨판 2000여 개로 산호를 잡고 조개를 집는다. 연구진은 화장실 청소봉 형태의 빨판을 장갑에 붙였다. 장갑 내부 공기를 빨아들이면 음압이 발생해 물체에 달라붙는다.
연구진은 빨판 옆에 레이저 거리 측정계인 라이다 센서도 붙였다. 레이저 반사파가 빨리 돌아오면 물체가 근접했다고 보고 바로 빨판에 음압을 건다. 덕분에 장갑을 물체에 대기만 하면 빨판이 저절로 달라붙는다. 연구진은 “해저 유물 발굴이나 의료 현장처럼 물속이나 젖은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참고 자료
APL Bioengineering(2024), DOI: https://doi.org/10.1063/5.0169558
ACS Nano(2024), DOI: https://doi.org/10.1021/acsnano.3c09304
Science Robotics(2023), DOI: https://doi.org/10.1126/scirobotics.ade4698
Science Advances(2022), DOI: https://doi.org/10.1126/sciadv.abq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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