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지구공동체를 사유하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2024. 10. 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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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견문록]

여름 무더위를 겪으면서 두려워졌다. 올여름 무더위는 참기 힘들었다. 과학자들 말처럼 조만간 세상이 붕괴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답답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온난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외치는데 상황은 왜 개선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파국이 보이는데도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위기가 뿌리 깊은 원인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근대적 자연관까지 올라가게 된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게되었다. 책은 새로운 학문인 지구인문학, 인류세인문학을 소개하며 이에 비견되는 한국의 사상가들을 소개한다. 철학자 조성환의 책 <K-사상사>(조성환 지음, 다른백년 펴냄)이다.

지구온난화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지구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인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구환경과학이 팩트에 치중할 때 지구인문학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묻는다. 저자는 지구인문학에서 주어는 '지구'라 말한다. '근대'라는 개념에 '서구'라는 주어가 숨어있듯이 지구인문학의 주어는 당연하게도 '지구'다. 저자의 말이다. "지구인문학은 인간 이외의 존재, 즉 사물까지도 인문학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사물인 지구를 주어 자리에 넣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저기에서 기후위기의 징후가 나타나듯이, 지구의 거주가능성이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더 생활할 수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 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상기책 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전체주의 연구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현대에서 지구를 근원적으로 사유한 철학자였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지구는 우주에서 인간이 별다른 노력없이, 그리고 그 어떤 인공물도 없이 움직이고 숨쉴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하는 유일한 곳이다."(<K-사상사>에서 재인용) 그의 책 <인간의 조건>(한길사 펴냄)에는 지구(earth)가 200번 넘게 등장한다. 지구가 당연한 존재이면 지구를 대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지구가 어느새 공기같은 존재가 아니게 되었기에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1958년에 출간된 그의 책은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성공한 지 1년 후의 일이였다.

천지자연을 인간의 모태로 생각하는 사유는 동아시아에서는 익숙한 사고였다. 천지론(天地論)이나 천인합일 사상이 대표적이다. 동아시아만큼은 아니었더라도 근대 이전의 서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지구라는 천연조건과는 별도로 인간만의 거주조건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다. 지구로부터 독립을 감행한 것이다. 그것이 과학기술에 의한 인공세계의 구축이다. 여기에서 세계는 둘로 양분된다. 하나는 자연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세계이다.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천인분리(天人分離)의 시작이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이 구축한 인공세계는 생명의 본질적 조건이 아니다. 있으면 좋은 그런 부차적 존재이다. 세계인들이 인공위성의 성공에 감탄할 때 아렌트는 오히려 탄식한다. "인간의 아버지인 신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던 근대의 인간해방과 세속화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 지구를 거부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끝나야하는가?" 인간이 인간 생존의 본질적 조건인 지구를 버리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아렌트는 '지구소외'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기후위기가 일상의 뉴스가 되기 훨씬 오래전에 아렌트는 지구를 사유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자연'은 일본 메이지시대 영어 'nature'의 번역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연(nature) 대신 '천지(天地)'가 사용되어 왔다. 자연 대신 사용된 천지는 어떤 의미를 내포했을까? 일본의 농사전문가이자 작가인 우네 유타카는 자신의 책 <농본주의를 말한다>(우네 유타카 지음 김형수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에도 시대에는 'nature'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선조는 인간과 자연을 나누지 않고 인간도 자연을 포함하는 '천지'라는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네 유타카가 말하는 의미는 'nature'는 인간과 분리되지만 '천지'는 인간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즉 천지라는 개념을 취하면 자연에 대한 착취는 장려되질 않는다. 인간 역시 천지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농본주의는 단단한 사유의 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 줄리아 토머스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자연'은 자유를 억압하고, 전통을 맹목적으로 이어가며, 때로는 '동양적인 것'을 가리켰다." 자유가 확대되기 위해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일본의 철학자 시노하라 마사타케는 자신의 책 <인류세철학> (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음, 모시는 사람들 펴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근대란 자연의 위험성을 제거해 나가는 역사이기도 하다. (중략)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작위와 자연을 대립시켜서 인공적인 것을 만드는 작위야말로 근대화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인간의 본질적 조건으로 성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후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자연의 두려움을 제거한다는 근대에 대해서 인도출신의 학자 차크라바르티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근대인의 자연개조작업 덕분에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줄어들었다. 문제는 이와 함께 근대인이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 상실을 위기의 근원적 원인으로 지목한다. 저자 조성환의 책에는 이 대목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외경'이라는 정서가 친생태적 문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설명이 좀 생소할 수 있다. 윤리에 지독하게 천착한 철학자 칸트의 숭고미에 대한 분석을 보면 해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칸트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적 쾌감의 경험을 취미판단이라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미적 감흥은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으로부터만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높은 산의 정상에서 말할 수 없는 감흥을 느낀다. 일상경험과 분리된 이 경험을 '숭고체험'이라 불렀다. 숭고체험은 주로 자연에서 나타나는 압도적 크기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숭고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광풍 속에 포효하는 바다, 무한정 펼쳐지는 사막과 같이 인간의 지각 조건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의 크기에 의해 유발된다."(<왜 칸트인가>(김상환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에서 인용) 이런 숭고체험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철학자 김상환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현상(숭고체험-필자주)들이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속적인 삶에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물질적인 부와 권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무한히 작은 것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이런 각성은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게 해주는 힘이 된다. 김상환은 칸트의 숭고체험에 대한 질 들뢰즈의 논의를 소개한다. "숭고체험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에 숨어있는 갱생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하나의 정치 집단이나 조직의 갱생능력은 위기 상황에서만 검증된다. 위기에 빠졌을 때 비로소 그 조직의 생명력이 검증되는 것인데, 인식능력(더 정확히는 공통감)들의 발생 및 갱생 역략은 숭고체험 속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다."

이성의 한계를 설정하려한 칸트는 어떤 철학자 못지않게 도덕에 천착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불러오는 도덕적 아노미상황을 예민하게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격신을 거부한 선비들이 왜 그토록 자연에 대한 감상을 많이 남겼는지도 이런 연유에 있을 것이다. 유교연구자 김기현의 책 <선비> (김기현 지음, 민음사 펴냄)는 조선 선비들의 세계관과 삶에 관한 탁월한 책이다. 책에는 자연을 느끼고 감상하는 퇴계 이황의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선비들에게는 자연을, 천지를 온 마음으로, 제대로 느끼는 것이 마음수양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자연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힘껏 느끼면서 내면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말하자면, 여러 해 전 단풍철에 한계령을 넘은 적이 있다. 한계령 산속에서 본 단풍의 선명함과 산세는 칸트의 숭고체험과 동일했다. '천지만물'이라는 선비들의 말이 실감되는 필자의 경험이었다. 자연에 대한 감격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각(반드시 인격신일 필요는 없다)을 각성시킨다. 인격신이 없는 곳에서 도덕적 초월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이런 초월에의 감각이 필요하다. 서구문명과 접한 정약용이 굳이 원시 유교의 상제를 호출하려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서구 근대주의의 적장자인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다는 북한이 수령론과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희한한 개념을 고안해낸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는 사회건설의 총체적 이념이 되기에 너무나 부실하다. 이런 부실함을 주의주의(voluntarism)로 돌파하려다 결국 개인숭배로 빠져버린 것이다.

저자는 서구의 지구인문학이 도입되기도 전에 한반도에서 피어난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해월 최시형, 시인 한용운, 생명사상가 장일순, 김지하, 대통령 김대중 등이다. 조선의 동학인 해월 최시형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사상과 인간적 면모를 간략한 소개로 갈음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위대한 인물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 전체를 통해 가장 큰 수확은 해월의 위대함이 어떤 맥락 속에서였는지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이라 말하고 싶다. 김용옥 선생이 왜 해월을 그토록 숭앙하는지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정치가 김대중은 또 다른 의미에서 독특한 존재다. 사상을 현실에서 풀어내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변덕스런 대중의 마음을 진보의 유일한 동력으로 삼아 개혁을 끈질기게 추동해내기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성공한 영웅이 드문 것이다. 1994년 서구의 지구인문학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도 전에 김대중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의 말은 한 정치가를 성공으로 이끄는 진정한 동력은 인간과 만물에 대한 깊은 사랑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말이다.

"지구상에 있는 들짐승·날짐승·물고기·공기·물·흙·나무와 들판에 자라나는 풀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의 생존권을 사랑과 속죄의 심정으로 보장해야 한다."

▲ <K-사상사>(조성환 지음, 다른백년 펴냄). ⓒ다른백년

[김창훈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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