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채색화 발전시켜 추상화 시도한 '하얀 비둘기'[아트씽]

아트씽 기자 2024. 10. 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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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연의 MMCA 소장품이야기(6)]
화가,아내,어머니,교육자로 살았던 박래현
인체 단순화·입체파적 면분할···추상 경향
평화의 상징 비둘기와 한복입은 여인들
1960년대 국립극장 소장품이 미술관으로
박래현 '하얀비둘기', 1961년, 종이에 채색, 186x96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서울경제]

여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바쁜 여인이 있다. 스스로 화가이며, 화가 운보 김기창의 아내, 청각장애인의 아내면서 4남매의 어머니이자 교육자인 박래현이다. 그이는 그 많은 일에 쫓기면서 작업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나이 40대에 들어선 1961년 전후 박래현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1960년 처음으로 해외를 방문하여 대만, 홍콩, 일본 등에서 전시를 개최하면서 세계로 향한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다. 백양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 문화자유초대전, 남편 김기창과의 부부전을 위주로 전시를 개최했음에도 활동의 한계를 느껴 스스로 진정한 예술가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서 더 의욕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발표했다. 1956년 ‘노점’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 수상 이후 화단의 기대가 높아진 가운데 1961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되었고 추천작가 자격으로 작품을 출품했다.

1961년 12월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무산되어 좌절하기도 했지만 남편과 작업실을 나눠 쓰면서 시간을 쪼개가며 작품을 제작하던 중 1962년 성북동에 아틀리에를 장만했다. 숙명여자대학교 취미반, YWCA 부인회 묵화반에서 여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한 이래로 여러 기관에서 여성들을 지도했다. 박래현은 안정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일궈가는 모범적인 여성상의 전형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하얀 비둘기’는 이 시기 제작한 작품이다. 박래현은 1950년대부터 여성의 인체를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추상화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입체파적 면분할을 선호했는데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 그리고 작은 얼굴 등 조형에 있어서는 수직적으로 길게 늘어뜨려 신비감을 부여했다. 채색과 질감은 이전보다 더욱 강한 효과를 추구하여 갈색조의 피부색, 검정색과 붉은 갈색의 한복은 토속적인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박래현은 한국 고유의 미감을 보여주고자 했기에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그림의 속 우아한 선의 흐름 또는 조형의 아름다움을 종합적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당시 동양화가들이 현대적인 한국화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있어 전통문인화 정신을 잇거나 채색화를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박래현은 전통적인 소재를 현대화해 조형적 실험을 거듭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작품은 머리 위로 하얀 비둘기 여러 마리가 날아다니는 아래 3명의 미인이 한복을 입고 자태를 뽐내는 듯한 모습을 담고 있다. 여인들의 표정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양손을 들어올리고 살짝 들어올린 고개를 통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강한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찍부터 작가의 그림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이는 아마도 결심한 것을 이루려는 의지나 힘든 세상을 뚫고 나가려는 기개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을 텐데 실험적인 도전을 거리낌없이 해나갔던 박래현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1950년대 후반 특히 종교, 신화적인 의미를 담은 대작을 그렸으므로 사랑, 평화, 안정을 구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듯 하다. 비둘기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데 박래현과 김기창 부부와 같은 성북동에 살았던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 윤중식의 그림 속에서도 비둘기는 매우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박래현 역시 다양한 화제를 다루었기에 동식물을 능숙하게 그렸고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새를 당연히 주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남편 김기창이 막내딸 태몽을 그림으로 옮긴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작품에서 하얀 비둘기는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므로 박래현도 마찬가지로 비둘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작품은 1962년 1월 공보부 주최 ‘34인전’(중앙공보관 화랑)에 출품되었는데 이후 어떠한 경위에서인지 국립극장에 소장되어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됐다.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은 1961년 당시 최고 힙플레이스였던 명동에서 대개수(大改修)작업을 하면서 전동식 회전무대, 70명 정도의 오케스트라 박스 등 첨단 무대시설 뿐만 아니라 난방시설, 위생시설 등을 완비한 종합예술의 전당으로 탈바꿈 중이었다. 무대예술의 르네상스 전당을 표방하였던 만큼 당시 활동이 왕성했던 미술가들이 건물 장식에 대거 참여했는데 이세득의 벽화와 주철물 장식, 청전 이상범, 허백련, 김환기, 김영주, 정창섭 등의 작품으로 로비 벽면을 가득 채웠다. 박래현의 ‘하얀 비둘기’ 역시 1960년대부터 국립극장 어느 공간에서 오랫동안 전시됐기에 작가가 꿈꾸었던 자신만의 회화를 완성하여 진정한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겠다는 의지와 예술적 성취도는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김기창의 아내, 여류화가라는 의도치 않은 타이틀 아래 가리워져 있던 박래현의 작품세계가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최된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시를 통해서 재조명되었으나 여전히 박래현의 작품은 시대를 앞선 예술가로서 미지의 영역 속에 남겨져 있기도 하다.

박래현의 ‘하얀 비둘기’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10월13일까지 개최되는 ‘작품의 이력서’ 전시에 출품됐다.

★박래현 :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6살때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해 군산공립보통학교,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사범핚교에 진학한 뒤 1939년 도쿄에서 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에 입학했다. 4학년 재학 중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했다. 1947년 시상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김기창을 만나 결혼하여 1948년부터 1971년까지 12회 부부전을 개최하였고 이후 김기창을 비롯한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하여 동양화단을 이끌었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대 이후 해외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의 시야를 넓혀 추상화로 경향을 바꾸었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였고 이때 중남미를 여행한 뒤 미국에서 판화를 배워 1974년 판화전을 개최하였다. 1976년 타계하였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인천시립미술관·대구미술관 자문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자문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자문위원, 성북문화원·대안공간 공간291 자문위원, 증도 태평염전 아티스트 레지던시 심사위원 등을 맡고 있다.

아트씽 기자 artseei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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