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빌런의 시대
영웅 아닌 악당 캐릭터에 열광
‘권선징악 서사’ 디즈니도 변화
이젠 반동 인물 고민해야 할 때
빌런이 주인공인 시대다.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 조커 얘기다. ‘조커: 폴리 아 되’ 개봉과 함께 전작인 ‘조커’가 재개봉되는 등 화제가 되고 있다. 조커가 처음 등장한 건 1940년대 미국 DC코믹스에서 출간한 ‘배트맨’ 연재였다. 이후 1990년대 팀 버튼 감독을 만나 잭 니컬슨의 조커가 탄생했고, 2000년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을 만나 히스 레저의 조커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영웅 배트맨보다 악당 조커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9년 드디어 조커는 영화의 타이틀 롤을 맡게 된다. 토드 필립스 감독작,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다.
그런데도 영화 ‘조커’는 평론가와 대중 모두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슈퍼히어로 무비의 틀을 뛰어넘었다. 사회적 고립의 문제, 미디어가 사회적 사건을 어떻게 소비하고 왜곡하는지 등 현대사회의 뒤틀린 그림자를 향한 깊은 시선이 인상 깊었다. 그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구부정한 어깨, 일그러진 웃음, 슬픔과 광기를 오가는 눈빛으로 빌런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정신적 고통을 생생히 그렸다. 이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오늘 개봉하는 ‘조커: 폴리 아 되’는 두 사람이 다시 뭉친 후속작이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조커와 그의 망상을 공유하게 된 할리 퀸의 이야기다. 할리 퀸 역시 이 시리즈의 주요 빌런이다. 팝스타 레이디 가가가 역할을 맡았다. 부제인 ‘폴리 아 되’(Folie a Deux)는 프랑스어로 ‘두 사람의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심리학 용어로는 ‘공유정신병적 장애’다. 이제 우리는 두 사람이 맞잡고 추는 고통과 폭력의 댄스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영웅이 아닌 빌런일까. 영웅은 멋있지만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빌런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영웅에 비해 빌런은 더 복잡한 심리적 동기와 갈등을 숨기고 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의 은밀한 내면은 종종 빌런에게 더 많은 공감과 자극을 느낀다. 최근 반(反)영웅, 즉 안티히어로 장르도 부각되고 있다. 주인공, 영웅이기는 하지만 정의, 용기, 매너 등 전통적인 영웅상을 벗어나 악당의 면모를 가진 캐릭터다. 얼마 전 세 번째 이야기를 선보인 ‘데드풀’, 이달 말 시리즈 피날레를 예고하고 있는 ‘베놈’이 대표적인 안티히어로다. 선(善)과 악(惡)의 모호한 경계선 위에서 더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영웅이 아닌 빌런에 대한 열광은 디즈니도 변화시키고 있다. 고전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마녀 말레피센트는 이미 2014년, 2019년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탄생시켰다.
심지어 지난 8월 디즈니는 올랜도 디즈니월드에 빌런 테마구역을 신설한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신데렐라, 알라딘 등 선한 주인공을 통해 주로 권선징악 서사를 내세웠던 디즈니의 놀라운 변화다. 디즈니가 공식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빌런 구역의 조감도에는 그동안 디즈니 동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대신 “행복한 결말은 머나먼 꿈”이라고 적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에서 인물은 자신의 도덕적 목적을 드러내야 한다. 첫째로 성격이 선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극의 주인공 캐릭터를 프로타고니스트(주도하는 자)라고 하는데 프로타고니스트가 궁극적인 선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장애물인 반동 캐릭터 안타고니스트(대립자)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과는 달리 오늘날 비극의 프로타고니스트 자리는 점차 선이 아닌 악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안타고니스트를 고민해야 한다. 빌런에 열광하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숙고해야 할까. ‘조커: 폴리 아 되’, 춤추는 두 빌런의 발끝을 따라 풍요 뒤에 숨겨진 현대사회의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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