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방문 에티켓… “공감 표현하되 짧게, 섣부른 조언 역효과”[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피해 안 끼칠 방문일 정하고, 앉기 권하기 전까진 앉지 말라”
세심한 예의 갖추라고 조언… 불평등성 자극 않도록 당부
“공책과 연필을 꺼내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적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라.” 이 구절은 19세기 영국의 목사 에드워드 커츠가 제안한 빈민 방문 에티켓의 한 대목이다. 자선은 본래 기독교인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였지만, 영국에서는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서 자선 기부액이 정부가 집행하는 빈민 구제 비용 전체보다 훨씬 많았다.》
1885년 ‘더 타임스’지는 런던 한 곳에서 걷힌 자선 모금액이 덴마크, 포르투갈, 스웨덴, 스위스 연합의 연간 예산보다 더 크다고 보도했다. 이 현상은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복음주의를 쉽게 설명하자면 복음(Gospel) 자체를 강조하는 기독교적 대원칙 위에 전도와 사회활동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광범위한 활동을 일컫는다. 교리보다 행동을 우선시하는 복음주의는 자선 같은 사회봉사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방문하는 ‘방문운동(visiting movement)’이 시작되었다.
성공적인 방문운동을 위해서는 신앙심과 기독교인의 의무감뿐만 아니라 적절한 에티켓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빈민 방문에 특화된 에티켓이 나타났는데,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월한 태도나 온정주의적인 행동거지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커츠는 빈민을 방문할 때 오히려 더욱 세심한 예의를 갖추라고 조언했다.
―노크한 후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라. 앉기를 권하기 전까지는 절대 앉지 마라.
―불편한 시간에 방문을 피해라. 한창 바쁜 아침 시간을 피하고 상대방이 훨씬 더 정돈되었을 오후에 방문해라.
―만약 적절치 못한 시간에 방문했다면 사과하고 즉시 떠나라. 그리고 당신에게 가달라고 할 때까지 머무르는 실수를 범하면 절대 안 된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톤’으로 말해야 한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버려라.
―정기적으로 방문할 날짜와 시간을 정할 것. 방문은 결코 변덕스럽거나 불확실하면 안 된다. 관계 당국으로부터 방문 허가를 받으면 곧바로 구빈원에 피해를 덜 끼칠 만한 방문 날짜와 요일을 정해야 한다.
―방문자는 구빈원의 규칙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는 쓸데없는 참견을 피해야 한다. … 수용자들이 당신을 실제적 혹은 허구적 불만으로부터 구제해 줄 사람으로 여기도록 만들지 마라.
―대화에서는 아주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를 구사해라. 가능한 한 단음절로 된 단어를 사용해라.
19세기 영국에서 중간계급은 이처럼 세세한 방문 에티켓을 만들면서까지 자선 방문에 열정을 쏟았다. 서로 돕는 행위를 통해 도덕적 향상을 이루어 감으로써 영원을 예비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선 활동은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중간계급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집합적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자선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계층 간의 사회적 구별이 오히려 강화되는 측면도 있었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에티켓으로 무장한 집단과 하층민의 실제 접촉은 사회적 지위의 우열을 가시화하게 마련이었다.
이것은 자선 활동의 양날과 같은 효과였다. 왜냐하면, 자선은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1925년)에서 주장한 바 있는 ‘선물하기’의 메커니즘 밖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상호 간에 호혜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연대감을 창조하고 관계를 강화하지만, 자선은 일종의 공짜 선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성격을 지닌다. 자선 행위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불균형을 표상하며, 자선이 배태한 기증자와 수증자 사이의 불평등성은 구조적으로 훨씬 더 근본적이고 영속적이다. 게다가 도로 갚을 수 없다는 무능력과 무력함은 연대를 만들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었다.
자선 행위에 수반되는 정교한 에티켓은 이런 위험을 의식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측면이 있다. 예의를 갖추어 ‘영속적 불평등성’을 자극하는 노골적인 언행을 억제함으로써 빈민의 분노를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구역 방문자에게 주는 조언(Hints to District Visitor·1858년)’이 설파한 “공감하되, 선심을 쓰는 척하지 마라. 친구가 되되, 빈민을 구제하려 하지 마라”는 제언은 이 복잡한 메커니즘을 함축적으로 드러내 준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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