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풀뿌리]‘식품사막’은 올바른 표현일까
몇달 전부터 언론에서 ‘식품사막(food desert)’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말은 가게가 문을 닫아 생선이나 두부, 계란 같은 신선식품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 농어촌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통계청의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2020년을 기준으로 전국의 행정리 중 73.5%에 식품 소매점이 없다. 시장이 멀고 교통도 불편해 농촌의 밥상이 척박해지고, 관광지가 아닌 시골 마을에는 식당조차 없어 집밖에서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7월 말 농림축산식품부는 식품사막의 해결책으로 생활필수품과 농산물을 실은 개조트럭을 농협과 함께 운영한다는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농촌이라는 사막에 이동식 오아시스를 만들어주겠다는 자비로운 발상이다.
사막이 은폐하는 불평등
그런데 왜 식품사막이란 말이 불편하게만 느껴질까? ‘지방소멸’이란 말이 청년이 줄어드는 지역 현실을 묘사하며 대안을 찾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불안을 가중시켜 인구유출을 부추기는 역설을 만들고 있다. 식품사막이란 말에는 그런 위험이 없을까?
그리고 먹거리를 생산하는 곳이 농어촌인데, 농어촌을 식품사막이라 부르는 것이 올바를까? 원래 식품사막은 영양가 있고 신선한 먹거리를 구입하지 못하는 도시의 빈민가 지역을 묘사하는 말이었다. 식료품점과의 거리보다는 소득과 교통 같은 사회경제적인 요인이 중요했고, 거리나 식료품점의 존재 여부가 정말 가격보다 중요한 문제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충분한 논의 없이 식품사막이 마치 농촌의 문제인 것처럼 묘사된다(사막을 불모지로만 보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자). 사실 콘크리트로 덮인 도시야말로 메마른 불모지이고, 물가가 올라 식료품점이 있어도 신선한 먹거리를 쉽게 집어들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게도 오아시스가 필요하다는 논점은 흐릿해진다.
식품사막이라는 말 자체를 문제 삼는 흐름도 있다. 미국의 먹거리정의(food justice) 운동은 식품사막이 인종과 계급 문제가 교차하는 현실을 은폐하는 용어라고 비판한다. 식품사막이라 불리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유색인종과 빈곤층이라는 점을 드러내지 않고 시장에의 접근성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운동은 식품사막 대신에 ‘식품 아파르트헤이트(food apartheid)’, 즉 식품차별정책이란 용어를 쓴다.
어쩌면 한국 현실을 묘사할 때는 ‘소외’라는 말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마치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과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지 못하고 소외되듯이, 농민들도 지금의 식품산업체계에서 자신의 노동과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육류 소비의 증가로 축사가 계속 늘어나는 농촌에서는 그로 인한 악취와 생태계 파괴 문제가 점점 불거지지만 그걸 해결할 힘은 농촌에 없다. 농민은 점점 더 대형화되는 식품산업체제의 계약직 노동자가 되고, 농촌은 도시에서 소비할 식량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고 있다.
농민과 농촌의 소외가 본질이다
반도체 산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막대한 투자도 서슴지 않지만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 수입부터 확대하는 나라에서는 이런 농민과 농촌의 위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2022년부터 식품산업의 생산실적이 최초로 100조원을 넘어섰지만, 농민들은 아직도 쌀 한 가마니 가격 20만원을 보장하라며 머리띠를 둘러야 한다. 식품사막은 이런 모순된 현실을 불편하지 않게 포장하려 든다.
그래서 농민과 농촌을 소외시켜온 사회가 고령화된 농민에게 시혜를 베푸는 장면은 뭔가 불편하다. 물론 고령화된 농촌 현실에서 푸드트럭이나 대신 장을 봐주는 주민도움센터, 이동장터 등이 당장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을 유지하는 일시적인 방법이다. 그 노인들마저 사라지면 우리 농촌은, 그 농촌에 기대어 살아온 도시는 어떻게 될까? 손수 기르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소비를 늘려온 도시의 사막화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농수산물이 정당한 값을 받고 그 일이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좋은 일자리로 인정받으며 농어촌이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곳으로 존중된다면 식품트럭이 돌지 않아도 지역은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그렇게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를 결정하는 힘이 세계화되고 거대화된 식품산업체제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현실의 풍경을 올바로 그려야 하지 않을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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