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혼자였지만, 지금은 함께라서 두렵지 않아…우린 역사의 한 페이지 쓰는 중”
‘1번’ 피해자는 1980년 5월 19일에서 20일 저녁 무렵, 광주 전남여고 후문에서 총을 찬 계엄군들에게 구타당한 뒤 당시 그가 몰던 브리샤 자동차 뒷좌석에서 2명에게 강간당했다. 시부모가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마련해준 차에서 피해를 당한 뒤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아직도 계엄군이 입고 있던 얼룩무늬 군복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그때 맡았던 술냄새, 땀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맡으면 구토한다.
‘77번’ 피해자는 5월 20일 오후 양림동에서 학동 집으로 가는 길에 군인들에게 붙잡혀 벽에 밀쳐진 뒤 가슴과 엉덩이를 추행당했다. 이후 대검으로 어깨 부근을 찔려 쓰러졌는데, 지금도 남은 이 흉터는 비만 오면 쑤신다. 가슴에 몽우리가 생기고 아픈 생리 때마다 피해 당시가 떠올라 힘들다.
‘35번’ 피해자는 5월 22일 연인의 죽음을 목격한 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구 전남도청에 갔다가 27일 새벽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그의 옷과 속옷을 벗긴 채로 조사하며 뺨을 때렸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화장실에 갔는데, 경비를 서던 군인이 안으로 따라 들어오더니 입을 막으며 강간했다.
‘2번’ 피해자는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전남도청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로 활동했다. 겨우 도망쳤으나 7월 3일 결국 광산경찰서로 연행돼 두어달 혹독하게 조사받았다. 석방을 며칠 앞둔 어느날 수사관이 그에게 비빔밥을 사주더니, 근처 여관으로 데려가 강간했다. 이후 여자로서의 삶은 포기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 조사 보고서의 번호 뒤에 익명으로 남아 있던 피해자들이 역사의 ‘증언자’가 된 건 한명, 두명의 피해 증언에 다른 이들의 증언이 덧붙여지면서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 ‘열매’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증언대회 ‘용기와 증언’을 열었다.
📌‘5·18 성폭력’ 피해자, 44년 만에 손잡고 세상으로…“국회는 응답하라”
이 증언대회를 나흘 앞둔 26일, 광주시 남구에 위치한 ‘2번 피해자’ 김선옥씨(66) 자택에선 준비 모임이 열렸다. 열매 홍보 담당인 김씨를 비롯해 대표 김복희씨(63·35번 피해자), 총무 최미자씨(62·77번 피해자), 회원 최경숙씨(71·1번 피해자) 등 네 명의 증언자가 함께 했다.
1980년 그날 이후 고립돼 있던 피해자들은 지난 4월 28일 광주 전남대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열매라는 이름의 자조 모임을 만들었고, 10명에서 시작한 성원은 15명으로 늘어났다. 30일 국회에서 열린 증언대회는 열매 모임이 함께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낸 첫 행사다. 그간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적은 있었지만, 대규모 증언대회를 열어 대중 앞에 함께 나서는 건 처음이다.
그중 김선옥씨 심정은 남다르다. 5·18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전남도청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며 시민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했다. 광산경찰서로 연행됐고, 상무대를 오가며 두어달 간 혹독하게 조사받다가 담당 수사관에게 강간당했다. 수십 년간 품고 있었던 이 아픔을 언론 인터뷰에서 공개한 건 2018년이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계기가 됐다.
그 후폭풍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사는 국내외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씨는 “수많은 언론사가 달려드는 바람에 전화기에 불이 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길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고 했다. 6년이 지난 지금은 다르다. 그의 곁엔 열매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다. 2018년 자살충동이 들 정도여서 광주를 아예 떠났었는데, 이번에 열매 모임을 준비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회원들을 초대한 것이 첫 번째 변화다.
김씨는 “오랜 세월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은 여러분 덕분에 더 힘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2001년 유방암에 이어 지난해 난소암까지 얻었지만, 이 활동만은 “끝을 보고 싶다”고 했다.
“40년 넘게 지난 지금도 내게 5·18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피해를 증언하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이건 꼭 하고 죽어야겠어요. 이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갈 거야. 그러니까 내 손 잡고 가자고.”
열매 대표를 맡게 된 김복희씨에게도 이번 기회는 떨리면서도 두려운 것이다. 그는 연인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걸 본 뒤 전남도청으로 갔다가 계엄군에게 끌려갔다. 상무대에서 수사관이 그의 속옷을 벗긴 채로 조사하며 뺨을 때렸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화장실에 갔는데 이때 경비를 서던 군인에게 강간당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 5·18 관련 보상 신청 관련 조사에서도 이 사실만은 꼭꼭 숨기고 살아왔다. 신혼 초 남편에게 성폭력 피해를 털어놓은 게 내내 ‘약점’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피해 자체를 외면하고 싶었다”며 “내 안위만 생각해왔는데 선옥언니가 항암치료 중에도 저렇게 나서는 걸 보고, 더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진상규명’ 결정을 받고 올해 처음 5·18 민주묘역에 갔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오랫동안 역사의 현장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어요. 열매 모임 회원들도 여기까지 오는 게 너무 힘들었을 텐데 꼭 이 헌신이 결실을 맺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최미자씨는 이날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를 A4 용지 여섯 장에 빼곡히 채워 왔다. 그는 열여덟 살 때 군인들에게 강제 추행을 당하고 대검으로 어깨 부근을 찔려 쓰러졌다. 최씨는 “항상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밤마다 잠꼬대를 했다. 옛날엔 연탄불을 때니까 그래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며 “열매 모임이 생긴 후 평생 짓눌렀던 고통이 조금씩 덜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어렵사리 용기를 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응원과 지지로 답해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최경숙씨는 2018년 정부 공동조사단이 실태 조사를 시작하자 가장 먼저 강간 피해를 신고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조사를 받고 나서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흐려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 정신적 부담감 등으로 3주간 입원했다. 증언을 앞둔 지금도 걱정이 크다.
최씨는 “아들이 ‘그거 한다고 보상금 얼마나 더 주겠냐’라고 해서 속상했다”며 “괜히 나섰나 후회했는데, 오늘 열매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다시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이 만약 다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고민하던 최씨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 일 할란다. 나는 창피 안 해. 이게 창피하다고 허먼 너는 다른 나라 가서 살아라, 이렇게 말할랍니다.”
옆에서 그의 손을 잡고 어깨를 쓸어주던 김선옥씨는 “돈을 얼마를 줘도 우리 인생은 보상받을 수 없다. 그건 우리 목숨값”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는 귀한 존재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에요. 내가 홀로 힘들여 키운 딸한테 ‘성폭력은 당했지만 끝내 지지 않았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https://www.khan.co.kr/kh_storytelling/2024/518testimony/
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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