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투옥·전향공작 견딘 서준식, 인권운동 새 장 열다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급물살
묻혔던 국가폭력 사건 공론장으로
인권운동 단체들 속속 창립 움직임
비전향 장기수 서준식, 인권운동 구상
인권운동 수평적 연대 필요성 제기
93년 ‘인권운동사랑방’ 첫걸음 떼
‘인권하루소식’ 팩스신문 발행 성과도
인권운동사랑방 세미나 매달 참여
문국진 고문피해자 모임 운영중 합류
인권자료실 서가 정리하며 ‘구슬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유권자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고, 의회정치가 살아났고,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는 정치적 변화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런 정치적 민주화의 과정에서 과거의 국가폭력·국가범죄 사건들이 공론장에 등장하게 되었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의 인권유린들이 국회와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인권단체들도 속속 창립되었다. 1987년 이전에는 70년대에 만들어져서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정도가 있었다. 6월 항쟁 이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1987),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1988), 민주주의법학연구회(1988)가 이 시기에 창립되었다. 천주교에서는 91년 천주교정의구현연합 산하에 인권위원회가 만들어졌다가 94년에는 천주교인권위원회로 독립하였다. 27개 사회단체의 연합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91년 12월에 인권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두었다. 노동인권회관도 89년에 설립되었다.
이런 흐름 중에 ‘새로운 인권운동’을 주창하는 그룹이 나타났다. 이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이 서준식이었다. 서준식은 1967년에 서울대 법대로 유학 온 재일동포였다. 그는 70년, 형 서승과 함께 보름 동안 방북을 했다. 71년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수감 중인 75년에 ‘사회안전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만기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들을 재수감하는 것이었다. 전국에 있던 만기 출소 비전향 장기수들을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하였고, 만기를 채운 장기수들도 이곳으로 옮겨서 감옥살이를 이어가야 했다. 형식적으로는 2년마다 심사를 해서 출소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상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준식이 주창한 새로운 인권운동
서준식은 본형 7년형을 다 산 다음에 사회안전법에 따라서 청주보안감호소에서 10년을 더 살았다. 총 17년의 감옥살이를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때 사상범에게 가해지는 전향공작은 사실상 살인적인 고문이었다. 그런 중에 그는 51일간의 옥중 단식농성을 통해서 사회안전법에 저항했다. 옥중 단식으로는 최고의 기록이었다. 강제급식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51일이라니, 엄청난 일이었다. 이런 일로 일본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작동했고, 그런 탓에 전향서를 쓰지 않고 1988년에 석방되었다. 그의 투쟁 덕분에 89년 사회안전법은 폐지되었고, 보안관찰법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조작을 주장하는 투쟁을 하다가 구속되었고, 집행유예로 출소해서는 유서대필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중에 서준식은 새로운 인권단체를 만드는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1992년 10월이었다. 서준식 그룹은 인권단체들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열었다. 새로운 인권운동의 구상을 담은 ‘우리의 인권운동, 어디로 가야 하나?’ 발제문을 듣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곳에는 10개의 인권단체 사무국장들이 모였는데, 나도 유가협의 사무국장으로 참석했다.
“6월항쟁을 거쳐,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이 부문(인권운동)의 내부 분화·전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나 각 인권단체는 아직도 영세성을 면하기 어려운 ‘구멍가게’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전문화를 이루지 못하며 그리고 동력원이 없는 이들 여러 단체를 수평적으로 연대케 해줄 그 어떠한 장치도 우리의 인권운동은 갖지 못하고 있다.”
전혀 고민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당시의 인권운동이 양심수 석방, 고문, 의문사 같은 국가폭력의 근절을 위해서 분투하고 있는데, 그걸 ‘구멍가게’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구멍가게를 넘기 위해서 독립된 자료실을 만들고, 학자와 변호사, 활동가가 함께하는 세미나, 인권운동단체들을 연결하는 사무국을 만들고 그런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의견을 말하라고 해서 나는 “구상은 좋은데 그거 되겠어요?” 하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냈다. 거기에 참여한 다른 단체 사무국장들도 비슷한 입장들이었다. 기존의 인권운동단체들에 의해서 서준식 그룹의 제안은 거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멤버 되다
이후 서준식 그룹은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사무실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봉천동·낙원상가를 거쳐서 용산역 앞으로 옮겨 가면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다가 1993년 3월에 당시에 활동가들이 모여서 ‘인권운동사랑방’이란 단체 이름을 지었다.
단체 이름에 사랑방이라니, 약간 낯설었다. 인권운동가들이 문턱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그러면서 토론도 하고, 사업에 대해서도 의논하는 편한 자리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 사이에 나는 점점 인권운동사랑방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매월 여는 인권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세미나에 가면 저녁을 주는데, 대부분 카레였다. 큼직큼직한 감자가 들어간 카레였고, 다른 내용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 먹는 카레는 유별나게 맛이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빈 세계인권대회를 다녀오고 유가협도 그만둔 뒤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 주소를 그곳에 두면서 한층 더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인권운동사랑방의 멤버가 되었다. 내가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갈 때는 대표 서준식을 포함하여 노태훈, 염규홍, 심보선, 류은숙 등 기존 멤버에 빈 세계인권대회를 같이 준비했던 이대훈, 이성훈 등 천주교 국제연대 그룹이 합류해 있어서 활동가들이 10명도 넘었다.
인권자료실을 만들다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몸 쓰는 일이었다. 인권자료실을 만들어야 하는데, 앵글을 사다가 자로 재서 재단하고 쇠톱으로 절단한 다음에 판을 걸고 나사를 조여서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을 건물 옥상에서 8월의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진행했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서가를 짜서 배치하는 일은 이틀 만에 끝냈지만, 인권자료실을 만드는 일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인권운동사랑방은 내가 합류하기 1년 전부터 ‘인권하루소식’이란 팩스 신문을 내고 있었다. 무명의 신생 인권단체가 세상에 빨리 이름이 알려지게 된 데는 이 팩스 신문의 발행 덕을 많이 봤다. 그때의 통신기술 발전은 놀라운 일이었다. 삐삐가 등장했고, 팩스가 등장했고, 인터넷 통신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도 팩스를 쓰고는 있지만, 그때는 관공서나 기업들 중심으로 보급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걸 이용한 게 ‘인권하루소식’이었다.
매일 신문을 발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료들이 쌓이고 있었고, 그런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활동에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권자료실을 만들기로 했던 것, 그 작업을 신입활동가인 나와 함께 입사했던 최은아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도서관 분류체계를 본떠서 분류기호를 정하고 서류박스를 사서 그곳에 집어넣어서 정리했다. 그렇게 몇번의 작업을 하니 그런대로 자료실의 꼴이 났다.
한편으로는 고문피해자 모임을 운영하랴, 한편으로는 자료실을 만들랴 정신이 없는 중에 인권운동사랑방은 새로운 논의가 한창 열띠게 진행되고 있었다. 1994년 9월10일에 창립한 참여연대(창립 당시는 ‘참여 민주 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다)에 합류할 것인가를 두고 구성원 간에 찬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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