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축제 같은 하루, 전주 24시
(시사저널=글 강은주·사진 신규철)
10월, 불꽃처럼 형형한 축제의 즐거움이 도시를 에워싼다. 온종일 걸어도 가슴 벅찬 땅, '온고을' 전북 전주에서 보낸 하루를 펼친다.
10월 한 달 내내 전주 전역에서 축제를 즐긴다. 주요 축제를 통합한 전주페스타 2024는 물론, 전주한옥마을 일대에서 펼쳐질 전주문화유산야행도 주목할 만하다. ⓒKTX매거진 신규철
들쳐 멘 배낭엔 아직 새벽 공기가 배어 있다. 오전 10시, 풍남문과 얼굴을 바짝 맞댄 카페 '라이브어라이브'에 들어섰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숨을 돌리니, 그제야 창문을 가득 메운 문루가 눈에 든다. 견고한 석축부터 호방한 팔작지붕에 이르는 압도적 실루엣. 과연 '호남제일성' 전주에 도착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우리는 그것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길을 나선다. 천년의 기억을 간직한 거리, '게미'가 흘러넘치는 밥상, 수백 살 먹은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말끝을 늘어뜨리는 다정한 사투리, 전통 예술의 명맥을 지켜 왔다는 꼿꼿한 자부심···.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 한들 여전할 전주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 여행자의 열망은 KTX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실현되었다.
전주다운 장면을 만나는 법
돌올한 땅, 전주를 전주답게 하는 풍경은 무엇일까. 답을 구하기 위해 조선 시대 전라도 관찰사의 눈을 빌리기로 했다. 기록에 따르면, 갓 부임해 전주에 당도한 전라도 관찰사는 조경묘와 경기전에 참배한 뒤 집무실인 전라감영에 다다랐다. 이따금 풍패지관을 찾아 한양의 임금을 향해 망궐례도 올려야 했을 테다.
풍남문, 풍패지관, 전라감영, 경기전. 조선 왕조의 시작과 끝을 설명하는 네 장소를 두 발로 이어 나간다. 우선 전주를 에워싼 성벽의 남쪽 성문, 풍남문부터 살핀다. 고려 공양왕 원년에 세운 전주부성은 왕조가 바뀌고 전란을 맞으며 무너졌으나, 조선 영조 때 전라도 관찰사 홍락인이 '풍패의 남문'이라는 의미를 담아 새 이름을 붙인 성문을 복원한다. 풍패는 한나라 고조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왕조의 본향'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
전주부성과 함께 지은 객사 풍패지관이 풍패라는 단어를 사용한 또 하나의 건물이다. 2010년 문화유산 지정 명칭 변경 이전까지 이곳은 '전주객사'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원도심 최대 번화가 객사길의 어원이기도 하다.
풍남문과 풍패지관 사이, 전주가 500년간 전라도 의 수부였음을 증거하는 전라감영이 자리한다. 감영 터를 점유해 온 전북도청이 이전하면서 대대적인 전라감영 발굴 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선화당·관풍각·연신당·내아·내삼문에 이르는 주요 건물이 그대로 재건되었다.
전라감영은 행정기관을 넘어 호남 문화 예술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종이를 제작하는 지소와 책을 찍는 인출방을 두고 '완영(전라감영)책판'으로 '완영본'을 펴냈으며, 선자청을 설치해 임금에게 진상할 부채를 생산했다. 그뿐인가. 내로라하는 소리꾼의 경연인 전주대사습놀이를 감영의 통인청이 주관하기도 했다. 비옥한 전주 땅은 백성들의 배를 불렸고, 문화와 예술도 살찌웠다.
'조선 팝'의 신명 나는 풍경
10월, 전주는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 콘텐츠를 모아 초대형 축제 '전주페스타 2024'를 연다. 천년을 이어 온 전주의 공예, 출판, 미식, 공연의 멋과 흥을 한자리에서 만끽할 기회다. 전주, 나아가 전라도 문화의 근간인 전라감영에서 전주페스타를 미리 엿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통음악과 대중성을 접목한 조선 팝 뮤지션 '살롱드국악 선율모리'(이하 선율모리)에게 만남을 청한 것이다. "전통 박자인 '모리'에 서양의 선율 악기를 실어 청년의 삶을 이야기하는 음악을 창작, 연주하고 있어요." 선율모리를 이끄는 김혜련 대표가 달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가야금병창인 저 김혜련과 기타리스트 임채성, 첼리스트 김성민, 전통 타악 연주자 이민혁. 저희는 전북 권역에서 활동해 온 청년 음악가예요. 전북, 특히 전주는 전통음악의 중심지이자 여러 예술 장르가 공존하며 융합하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지역의 예술 유산은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선율모리의 모든 곡은 순수 창작곡인데, 그중 전라도 사투리에서 착안한 '아따, 거시기'라는 곡에서 지역성을 살려 보았어요." 제목처럼 "아따, 거시기"로 시작해 "어깨춤 들썩들썩허게 불러 볼랑께/ 일어나 추임새 한마디 해 보소"라며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노래로, 만남과 인연을 축복하는 가사가 절창을 이룬다. "내년엔 선율모리의 첫 앨범을 발매하고 네 번째 콘서트를 열 계획이에요. 춘향이의 꿈을 표현한 '갈까 보다'와 심청가를 편곡한 '청, 두리둥'에서 시도했듯, 판소리와 동시대적 목소리를 엮은 선율모리만의 실험적인 음악을 보여 드릴 거예요." 이들의 꿈결 같은 화음과 이야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고막을, 마음을 파고든다.
경기전에서 오목대까지, 조선을 걷다
오후 1시, 흩날리는 가랑비가 기와지붕을 짙은 먹빛으로 적신다. 흐린 날의 정취마저 근사한 곳, 전주한옥마을에 다다랐다. 고아한 돌담을 따라 걷는 동안 낯익은 풍경을 맞닥뜨리고, 변하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다. 방문객과 상업 시설이 늘어나 시끌벅적해졌어도, 전주한옥마을은 경기전과 오목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첫손에 꼽힐 도시의 랜드마크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옥을 중심으로 한복, 한식, 한지, 한방 등 한국 전통문화가 축적되어 2010년 국제슬로시티연맹이 지정한 슬로시티로 공인받기도 했다. 이 마을이 일제에 맞서고자 1910년대부터 조성한 한옥 주거 지구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은,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복작복작한 태조로를 뒤로한 채, 우리의 걸음은 경기전으로 빨려 들어간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한 경기전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조경묘. 두 장소의 공통점은 '경사 경(慶)' 자를 품었다는 데 있다. 여기서 경사란 조선 왕조의 창건을 의미한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전각 어용전을 전주, 경주, 평양에 지어 올렸다. 세종 때 전주의 어용전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전주사고가 들어섰고, 태조 어진을 봉안하던 진전의 이름도 경기전이라 새롭게 명명했다.
빗물을 머금은 경기전의 녹음은 어느 때보다도 짙푸르고 무성했다. 하늘을 다 가릴 듯한 아름드리 나무와 신비로운 대나무 숲, 아직 꽃을 채 떨구지 못한 분홍빛 배롱나무···. 청량한 풀 향기와 따뜻한 흙 내음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 정문과 홍살문을 지나 태조 어진을 알현하고, 수복청·마청·서재·제기고·조과청 등 부속 건물을 둘러본 뒤 현존하는 유일의 태조 어진을 모신 어진박물관, 조선의 시작을 상징하는 조경묘, 예종대왕 태실비와 전주사고까지 한붓그리기하듯 걸었다. 모든 순간이 인상적이었는데, 경기전의 담장과 전동성당의 이국적인 지붕이 포개어지는 모습만은 유독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다.
전주한옥마을의 보석 같은 공간들
경기전 남동쪽 언덕바지에 오목대가 자리한다. 수백 채 기와지붕이 어깨를 맞댄 그림 같은 장면을 굽어보는 전망대이자, 이성계가 승전 축하 잔치를 열고 '대풍가'를 노래하며 개국 의지를 천명한 장소다. 경기전부터 오목대까지 이르는 길은 고작 500미터 정도에 불과하나, 골목 곳곳엔 전주한옥마을의 진정한 멋을 경험하게 하는 공간들이 밀도 높게 자리한다.
각별히 손꼽고 싶은 두 곳은 전주공예품전시관과 교동미술관이다. 전주의 공예 문화를 망라한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는 전북 지역 명인이 제작한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부채와 가방, 모빌과 소반 등 공예품을 손수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즐거울 것이다. 전시관의 사랑스러운 호랑이 캐릭터 '호사원'을 활용한 디자인 소품은 훌륭한 여행 기념품이 되어 준다. 교동미술관은 한때 이 일대에 자리했던 봉제 공장 지구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건물 일부를 그대로 살려 조성한 시각 미술 중심 전시 공간이다. 소담한 조각 정원, 노동자들의 지난한 역사를 엿보게 하는 재봉틀, 한지사를 활용한 자체 섬유 브랜드 'GD 아트'의 고운 패브릭 제품들이 마치 하나의 작품인 양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반짝반짝, 전주의 밤
전주의 멋은 덕진공원으로 이어진다. "영(嶺) 넘어/ 구름이 가고/ 먼 마을 호박잎에/ 지나가는 빗소리/ 나비는 빈 마당 한 구석/ 조으는 꽃에/ 울 너머/ 바다를 잊어/ 흐르는 천년이/ 환한 그늘 속 한낮이었다". 산책로 한편에 놓인 전북 출신 시인들의 시비를 살펴보다가 이철균 시인의 '한낮에'에 마음이 머문다. 오후 6시. 어느덧 한낮에 내리던 비가 멎더니, 구름 사이에 저무는 햇빛이 아른거린다. 연잎이 너울을 이루는 덕진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주 8경 중 하나로 꼽는 '덕진채련'의 풍광이 이런 것이리라.
'큰 나루'라는 뜻을 지닌 덕진(德津)이란 이름은 덕진호에서 왔다. 과 에 등장할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호수다. 후백제의 견훤이 방어 전략을 위해 만든 늪이라는 설, 풍수에 따라 지맥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었다는 설 등 호수의 기원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무엇 하나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전주 사람들은 그저 이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공원을 사랑했다. 창포와 연꽃, 벚꽃이 수놓는 계절이면 낭만은 증폭된다.
호수 한가운데 놓인 연화교를 건너 연화정도서관으로 간다. 전통 한옥의 건축미를 살린 건물 외벽은 때때로 눈부신 미디어 파사드 배경이 된다. 편안한 좌석에 앉아 문살 너머 덕진공원의 풍경을 마주한 채, 전북 출신 문인들의 책을 뒤적이는 여유를 즐겼다. 특히 과 을 쓴, 전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 양귀자의 소설은 좀처럼 손에서 떼기 어려웠다. 눈 깜짝할 새 밤이 찾아왔다.
전주는 지난해 국제명소형 야간관광 특화도시에 선정됐다. 밤이 낮만큼이나 화려한 도시라는 뜻이다. 어둠이 완연한 오후 8시. 야간관광 특화도시의 면모를 눈으로 확인할 시간이다. 공장을 개조한 복합 문화 공간인 팔복예술공간에서 남은 밤을 보내기로 했다. 카세트테이프 모양으로 불 밝힌 네온사인 가로등, 조명에 휩싸여 꽃망울을 틔운 듯한 이팝나무 가로수, 광선 검처럼 기묘한 빛을 발하는 굴뚝···. 한때 방치되었던 폐공장이 이렇게나 휘황한 밤의 놀이터가 됐다.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올 법한 흥겨운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다. '팔복예술공장'이라 커다랗게 써 붙인 기름 탱크마저 근사해 보인다. 비로소 전주가 지닌 아름다움의 연원을 알 듯하다. 이 도시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 내려는 마음이 있다. 또다시 천년이 흐른다 한들 그대로일 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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