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가사노동자의 ‘값’ [한겨레 프리즘]

장수경 기자 2024. 9. 3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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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가사관리사의 업무 투입 직전인 지난 8월27일 국회 토론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들의 급여를 최저임금 아래로 낮춰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장수경 | 전국팀장

“유창한 영어 실력과 한국어 의사소통 가능.”

두달여 전, 나는 서울시가 낸 보도자료를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9월부터 시작하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을 이용할 가정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였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굵은 글자로 강조된 중간 제목이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검증된 필리핀 가사관리사 100명 선발’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어 실력에 대한 언급은 필리핀 가사관리사를 설명하는 내용 중 가장 앞단에 섰다. 돌봄에 대한 이들의 전문성이나 범죄 이력보다도 먼저였다. 7쪽짜리 보도자료엔 ‘영어’에 관한 언급이 다섯 차례나 나왔다. 신청자가 많아야 ‘시범사업의 성공’을 점칠 수 있기에 ‘영어공화국’을 좇는 이들의 욕망을 노리겠다는 서울시의 속내가 보였다. 자녀가 말을 떼기 전부터 영어에 노출하는 한국 사회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유창한 영어 실력’은 어린 자녀를 둔 이들의 민감한 고리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언론들은 ‘영어 유창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온다’ 등의 제목을 단 기사를 써냈다. 한 언론은 이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집안일도 도움받고 자녀도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할 수 있다는 시민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동료 기자와 의사소통, 자녀 교육열 등의 이유로 강남 3구의 신청률이 높을 것 같다는 대화를 했었는데,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서비스를 신청한 731가구 가운데 강남 3구에 거주하는 이들이 42.7%(312가구)였고, 선정된 157가구의 33.7%(53가구)로 가장 높았다. 이번 시범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서울시와 정부도 이를 예상했던 것일까.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공동 숙소는 강남구 역삼동이다.

서울시는 시범사업의 호응도가 높다며 분위기를 띄우고, 다른 한쪽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필리핀 가사관리사의 최저임금 적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오 시장은 지난달 말 국회에서 열린 ‘필리핀 가사관리사 임금, 무엇이 문제인가’ 세미나에 참석해 외국인 가사관리사 월 임금이 100만원도 안 되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긍정적인 사례로 들었다. 이어 “(외국인 가사관리사들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어렵게 도입한 제도가 반쪽짜리에 그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정부·여당도 외국인 가사관리사에게 차등 임금을 적용하자는 의견에 보조를 맞춘다.

오 시장의 주장에는 저평가되고 있는 돌봄의 가치나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발생하는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한 인권침해는 없었다. 단지 값싼 노동력의 필요성만 있을 뿐이었다. 홍콩에선 2017년 4월 40대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침대에 쓰러진 채 발견됐는데, 새벽 3시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과로가 원인이었다. 2017년 싱가포르 독립연구기관 ‘리서치 어크로스 보더스’ 연구에 따르면, 싱가포르 가사노동자 10명 중 6명이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 2명이 처음 출근한 지 2주 만인 이달 15일 현장을 이탈한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한국에 온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1인실(1.45평) 2인실(1.96평)에서 월 40만원 수준의 주거비를 내야 했고, 지난 8월20일에는 임금에 해당하는 교육수당이 체불됐다가 뒤늦게 지급돼 논란이 일었다. 이탈 뒤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밤 10시 통금’ ‘외박 금지’ 등을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정부는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저출생·고령화 시대에 부담이 늘어나는 돌봄 영역에 이주노동자가 유입되는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번 시범사업이 이주노동자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자는 손쉬운 구상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어까지 유창한.

“글로리입니다. 한국에서 좋은 추억 만들고 싶습니다.” 이번 사업에 참여하는 글로리 마시나그씨가 한국에 도착해 한 말이다. 공공성이 강한 돌봄 영역을 ‘가격’으로만 따지는 상황에서, 글로리씨가 과연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갈 수 있을까.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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