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신영전 칼럼]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준비도 안 된 큰 규모의 의대 정원 증원을 갑작스레 발표한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이 의사단체 말대로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도, 또한 국민 건강보다는 대형 병원, 민간 보험회사, 의료 산업계의 귓가 송사에 호응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불법이 아닌 한, 정권과 싸워 이기긴 쉽지 않은 것이었다. 더욱이 의료 현장에선 이미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라는 의사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의사단체조차 이 ‘의사 부족 현상’을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기에 국민 다수는 의대 정원 증원에 찬성했다. 국민까지 이렇게 생각하면 이 싸움에서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아리셀 화재 참사 등으로 억울한 수많은 이들이 몇 개월, 몇 년째 폭염과 혹한 속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농성해도 정부의 한 줄 답변이나 신문사의 일단 기사도 얻지 못하는 데 비하면, 의료대란이 이렇게 오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의사 집단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설령 갑작스레 정부가 결정을 번복해도 마찬가지다.
이 패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순간과 이유가 있다. 첫째, 전공의들의 사직 공백이 너무 길어져 비극이 발생한 순간이다. 받아주는 응급실이 없어 죽은 어린 환자와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고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제도 탓, 선배 탓이 있고, 전공의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죽어가는 환자 곁을 떠난 의사를 죄 없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소수의 극단적 의사가 만들어낸 잘못된 서사다. 이들은 한국 의료의 문제들이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며 의사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피해자 의식’, 자료의 ‘자기 편의적 왜곡’,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완결이 어려운 부분을 ‘특정 정권’, ‘노동조합’, ‘좌파’ 탓으로 돌리는 자기 완결적 서사를 만들었다. 이 중 ‘피해자 의식’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조차 정당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문제는 이 서사가 폐쇄적인 의료계 내에서는 마치 진실인 양 확대 재생산되어 의료계 다수의 신념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잘못된 서사는 의사들을 추동하기에는 요긴했지만, 정부와의 타협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번처럼 정책 결정에서 배제되거나 싸움에서 질 빌미를 제공했다.
셋째, 환자나 시민들을 “견민”, “개돼지”, “조센징” 등으로 부르며 조롱하거나, “(환자들이) 응급실을 돌다 죽어도 아무 감흥이 없다”, “더 죽어서 뉴스에 나왔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는 등 패륜적 글을 올리고, 다수의 동료 선후배 의사들이 이 같은 발언을 제지 못 한 것이다. 의협 회장이 판사에게 “이 여자 제정신인가”라고 막말하고, 부회장이 “장기 말 주제에, 건방진 것들” 같은 저질 발언을 하는 순간, 의사들은 졌다.
며칠 전, 진료 의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한 의사가 윗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구속 심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의대 교수로 그 모습을 보는 심사는 복잡하지만,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 이름을 공개하는 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엔 의사가 졌지만, 의료 분야 대혼란은 이제 시작이다. 초고속 고령화와 함께 3~4년 후부터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면, 의사 증원보다 더 큰 파도인 지불방식 개편, 병의원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등 더 강력한 정책이 줄을 이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 추세로 민간 보험의 힘이 계속 커지면, 의사들은 정부보다 훨씬 혹독한 대자본과 시장에 의해 더 심하게 갈가리 나뉘고 시달리는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싸우면 백전백패다.
의사가 이겨야 할 때도 있다. 가난하고 오지에 산다는 것이 의사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의사들, 이번 추석 연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환자를 돌보느라 딱딱한 침대에서 쪼그리고 쪽잠을 청하거나 왕진가방을 들고 길을 나선 의사들은 이겨야 한다. 이 의사들이 이기기 위해선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방법은 극단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합리적인 대안을 가지고,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이 방법밖에 없다.
나는 30년 의료정책을 전공한 의사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환자의 행복과 의사의 행복은 하나만 있으면 틀리고, 둘이 함께할 때만 정답이라고 믿는다. 얼마 전 올림픽이 끝났다. 살아생전에 의사들이 시상대에 오르고, 국민이 환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여하튼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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