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38] 도착
도착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문정희(1947-)
‘역’은 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의미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어떤 단계나 대목, 혹은 막다른 곳을 함께 뜻한다고 보아도 좋겠다. 아니면 지나온 일과 여정을 돌이켜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는 어떤 언덕 같은 곳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일이 잘 풀려서, 뜻밖에 행운도 좀 얻어서 근사한 곳에 이르고 싶어 하지만, 혹은 그럴듯하게 괜찮은 곳에 도달하려고 애쓰지만 기대한 만큼 성사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에 낙담하고 실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거꾸러지고 깨지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탈이 없고 꺼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저 가을의 열매를 보라고 권한다. 벌레 먹고, 바닥에 떨어져 마구 뒹굴고, 설익고, 한쪽이 떨어져 나간 열매를 쥐게 되더라도 눈물이 나게 좋은 일이라고, 감격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해도 좋다. 도착한 역은 충분히 환하고, 꽤 빛나고, 넉넉하게 곱고, 제법 아름다운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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