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인가, 짐승인가, 사물인가… 욕망에 대한 태도에 달렸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욕망의 대상 앞에서 날뛰면 짐승… 모든 욕망을 제거하면 사물
욕망을 긍정하면서 통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
식사 전 기도하는 노인처럼…
사물도 빛난다. 일상에서 부산하게 사용될 때는 빛나지 않는다. 새벽에 목이 말라 어두운 거실 한쪽 창 밑 물잔에 손을 뻗을 때, 주변의 사물들이 희미한 새벽빛 속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 사물은 그저 일상의 도구나 장식품이 아니라 실내의 정물(still life)이다. 이것들은 실내에 있기에 문명을 상징하고, 가만히 있기에 죽음을 상징하고, 침묵하고 있기에 인내를 상징한다. 사물은 정물이 될 때 빛난다.
렘브란트의 제자 니콜라스 마스가 그린 ‘노인의 식전 기도(Old Woman Saying Grace)’를 보라. 여기서도 인간과 짐승과 사물은 빛나고 있다. 이 그림은 오직 일상을 그리거나, 단지 실내를 그리거나, 그저 세상을 그린 것이 아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주변을 어둡게 처리하여 빛이 인간, 동물, 사물에 각기 집중되도록 그렸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과 짐승과 사물이 각기 주인공이 되도록 화폭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세 주인공의 비교가 이 그림의 핵심이다.
식탁 위의 그릇과 칼과 빵, 그리고 기물들은 모두 정물화의 관습대로 그려졌다. 다른 정물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칼은 관람자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모래시계는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사멸해 갈 것임을 뜻하고 있다. 둥근 빵은 입 없는 사물답게 침묵하고 있다. 이처럼 사물들은 “가만히 존재하고(still life)” 있는 반면에 고양이는 식욕을 참지 못해 식탁 위로 뛰어오르려고 한다. 고양이가 발톱으로 움켜쥔 식탁보는 금방이라도 끌려 내려갈 것 같아서 이 그림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한다. 짐승을 대표하는 고양이. 이 고양이는 자제할 수 없는 짐승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는 이 늙은 여인은 죽은 듯이 존재하는 사물과도 다르고 욕망으로 날뛰는 짐승과도 다르다. 이 여인은 날뛰는 대신 기도에 열중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기에 더 나은 것을 갈구하고, 지금 주어진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기에 감사하는 행위다. 기도는 사물이나 짐승이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예식이다. 이 여인의 기도는 음식물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기에 한층 더 각별하다. 짐승이라면 날뛰었을 욕망의 대상 앞에서 멈추어 기도한다는 거니까.
이처럼 욕망의 대상 앞에서 자신을 통제할 때 비로소 인간성이 깃든다. 단군신화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환웅이 무엇을 요구했던가. 어두운 동굴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견디라고 요구했다. 인간성의 핵심이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자기 통제임을 알았기에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넘쳐나는 욕망에 자신을 맡겨버릴 때,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다. 음식을 보는 순간 생각 없이 이미 먹고 있다면, 어떤 이성적 판단도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기보다는 짐승이다. 짐승이 된 인간은 생각이 아니라 반응에 몰두할 뿐, 그를 지배하는 것은 그의 생각을 넘어서 있는 어떤 야수적인 힘이다.
욕망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게끔 하기에, 두려운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능사일까? 모든 욕망을 제거했을 때 인간은 인간도 짐승도 아닌, 사물이 된다. 욕망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통제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남들에게 강제로 통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조율해 낼 때 자유가 깃든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늘 인간인 것은 아니다. 강한 식색에 사로잡혔을 때, 우리는 동물이 아니었나. 인생이라는 극장에서 쓰러져 있는 시체의 역을 맡았을 때, 우리는 사물이 아니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묵묵히 들어주어야만 했을 때, 우리는 석고상처럼 사물로 변하지 않았나. 같은 인간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만 간주했을 때, 우리는 짐승으로 변하지 않았나. 자신을 스스로 조율할 때, 주어진 것에 감사할 때, 현재보다 나은 상태를 꿈꿀 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 욕망의 대상 앞에서 잠시 묵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주-의협 ‘정부 뺀 협의체’ 논의…李 “정부 개방적으로 나와야”
- 귀국 尹, 마중나온 韓과 대화없이 악수만…24일 만찬 ‘갈등 분수령’
-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32명 중 30명은 의사…2명 의대생
- 檢, ‘文 前사위 특채 의혹’ 관련 前 청와대 행정관 27일 소환
- 곽노현, 진보 교육감 단일화 경선 탈락…강신만-정근식-홍제남 압축
- 이재명 사법리스크 재점화에…민주당 “법 왜곡죄 상정”
- “거짓말처럼” 하루만에 8.3도 뚝↓…불쑥 찾아온 가을
- 故장기표, 김문수에 “너부터 특권 내려놓으면 안되겠나”
- “연금개혁안 도입되면 75·85·95년생 150만원 더 낼 수도”
- “천석꾼 가세 기울었어도, 독립운동 아버지 원망은 이제 안 해요”[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