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게임 세상]아무도 그녀들을 능욕할 수 없다
지난주 수요일, 제17회 여성인권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올해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나의 가해자 추적기(My Sextortion Diary)>로, 파트리시아 프랑케사 감독(이하 파티)이 직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파티는 Sextortion 범죄의 피해자다. Sextortion은 주로 ‘몸캠피싱’이라 불리는데, 피해자의 나체 사진 등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는 범죄를 일컫는다. 사건은 파티가 노트북을 도둑맞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식당 안에서 몇몇 남성들이 조직적으로 파티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훔쳐간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파티의 메일함으로 웬 e메일 하나가 날아든다. e메일에는 파티가 찍었던 사적인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도난당한 노트북이 해커의 손에 들어가면서 파티의 개인정보와 사진, 연락처 등이 모두 유출된 것이다.
협박범은 시시각각 파티의 숨통을 조여오며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한다. 이런 와중에도 파티는 Sextortion 범죄 피해자 수칙을 철저하게 준수한다. 경찰에 신고할 것, 협박범과 소통하지 말 것, 돈을 주지 말 것. 그러나 믿었던 경찰은 해커의 신상을 알아내기는커녕 파티에게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다. 파티의 지인들에게 그녀의 사진을 첨부하여 메일을 보내던 해커가 사진을 대량 유포하겠다며 협박하자, 파티는 마침내 ‘이제 때가 왔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협박범이 쥐고 있던 자신의 사진을 스스로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개한다. 나의 몸은 부끄럽지 않다는 메시지와 함께.
압박과 불안, 고통이 차오르는 시간 속에서도 파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자신이 겪는 협박 범죄에 관해 공부하며, 해커가 보내온 e메일과 경찰 대응 등의 모든 상황을 영상과 파일로 꼼꼼히 기록해두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협박범들의 IP주소를 파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협박범이 사용한 사진 공유 서비스의 고객센터에 피해를 신고하자, 해당 서비스 회사가 그녀에게 엑셀 파일 하나를 보낸다. 파일에는 협박범이 파티의 사진을 올린 시각과 IP 주소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 자료를 토대로 파티는 협박범의 위치를 검색해본다. <나의 가해자 추적기>라는 제목이 붙게 된 경위다.
물론 IP만으로 가해자를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대개 VPN을 사용하여 IP주소를 위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그들이 사용했던 IP라도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임은 틀림없다. 서비스 업체가 피해자에게 선뜻 가해자 정보를 제공하는 이 장면을 보며, 얼마 전 본 뉴스가 떠올랐다. n번방과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가 무성하게 나오는데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어떤 정보도 제공할 수 없다며 버티던 텔레그램이 IP주소를 공유하겠다던 뉴스였다. 이 변화는 그냥 오지 않았다. 파티와 같은 이들, 즉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항의하고, 비판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이번 영화제엔 유난히 디지털성범죄 피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많았다. 영화 <나의 금발 여친>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자 ‘헬렌’의 이야기를 다룬다. 짧은 단편이었지만, 자신의 사진이 딥페이크에 사용된 사실을 알면서도 숨지 않고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기로 선택한 그녀의 용기도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가해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며 끌어내리려 해도, 여성들은 결코 끌려 내려가지 않는다. 파티도, 헬렌도 숨지 않는다. 이들은 도리어 카메라 앞에 나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만이 무성한 요즈음, 이 영화들을 보며 오랜만에 ‘존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존엄한 사람들의 빛나는 용기. 변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서야 할 곳도 바로 이러한 용기 곁이다.
조경숙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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