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재 표준화가 필요한 까닭[알아두면 쓸모 있는 한의과학]

기자 2024. 9. 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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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 전에는 단자 모양이 제조사마다 달라서 휴대전화를 새로 사면 충전기가 꼭 들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충전기를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충전 단자가 한 가지로 통일돼 생산단가를 낮추고 자원을 절감하는 경제적 효과가 있는 것은 물론, 사용자 입장에서도 충전기 하나를 여러 기기에 쓸 수 있으니 편리해졌다.

그런데 단자 모양이 똑같다고 해서 충전 효율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10와트(W) 일반충전, 40W 초고속충전 등 출력 성능을 구별해 공인된 시험법으로 성능 편차를 일정한 허용 범위 이내로 관리한다. 따라서 같은 출력의 충전기라면 어느 제품이든지 같은 수준의 충전 속도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표준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약의 표준화도 이와 비슷하다. 자연산에 의존했던 과거에는 약성이 최대화된 시점이나 품종을 따지기보다는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약초를 채취했으므로 효과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향약채취월령>을 편찬케 했다. 어떤 약초는 어느 시점에 채취해야 한다고 규정해 식물 생장주기에 따른 약효 편차를 줄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채취 시기를 특정하는 것만으로는 약효를 균일하게 하기에 역부족이다. 예를 들어 ‘사삼’이라는 한약재는 초롱꽃과의 잔대속 식물의 뿌리이다. 잔대속 식물에는 넓은잔대, 솔잎잔대, 층층잔대, 진퍼리잔대, 톱잔대 등 국내에만 20여 종이 분포하는데, 과거에는 별다른 규제 없이 이들을 모두 사삼으로 사용했다.

필연적으로 약성은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잔대속 식물 중 단 2종만 사삼으로 쓰도록 규정해두고 있다. 20여 종이 난립했던 충전기를 2종으로 통일한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약의 표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예컨대 인삼은 법적으로 진세노시드 Rg1 성분을 0.1% 이상, 진세노시드 Rb1 성분을 0.2% 이상 함유하도록 규정돼 있다.

그런데 인삼에는 이 두 가지 이외에도 수십 종류의 진세노시드 성분이 들어 있고, 그중 어떤 것은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반면 어떤 것은 부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등 약리 작용이 상반되기도 한다. 더구나 진세노시드의 함량은 같은 밭에서 캔 인삼끼리도 크게는 다섯 배까지 차이가 나기도 한다. 단순 계산하면 A 인삼 한 뿌리의 약효가 B 인삼 다섯 뿌리와 같을 수도 있다. 따라서 약효 성분의 함량을 균일하게 하는 것이 과제다.

약초를 재배하는 농업 관점에서는 유효 성분을 일정하게 함유한 품종을 개발하거나 우수한 개체를 발굴해 ‘클론(생물학적 복제)’으로 배양해 똑같은 유전적 특성을 갖는 작물만 생산하는 방법이 첫 번째 대책이 될 수 있다.

기후환경과 영양 공급을 통제해 동일한 조건에서 재배하고, 수확과 가공 방법도 표준화하는 것이 다음 단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생물은 개체 간의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약재를 대량으로 추출하고 약효 성분 함량을 측정해 항상 일정한 양을 함유하도록 제조해 필요한 분량만큼 투약하는 방법이 이상적이다. 사실 이 방식은 국내 제약회사에서 10여년 전부터 시도했다.

하지만 한약재는 추출물이 아니라 건조·절단된 생약이어야 한다는 의료 현장의 고정 관념을 넘어서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 편견과 규제의 산을 극복해 자연의 선물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고야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장

최고야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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