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408> 점필재 김종직이 지리산 유람 중 고열암 승려에게 준 시

조해훈 고전인문학자 2024. 9. 2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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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것 둘 다 어지러우니(求名逐利兩紛紛·구명축리양분분)/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구분하기 어렵구나.

위 시는 이튿날인 8월 15일 고열암을 출발하며 그곳 승려에게 준 시이다.

첫 구에서 고열암 스님과 김종직 자신은 세상 명예와 이익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힌다.

그를 주축으로 몇 사람이 지리산국립공원공단과 김종직의 550년 전 지리산 유람길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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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世間塵土不饒君·세간진토불요군)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것 둘 다 어지러우니(求名逐利兩紛紛·구명축리양분분)/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구분하기 어렵구나.(緇俗而今未易分·치속이금미이분)/ 모름지기 두류산 최고봉 정상에 올라보시게(須陟頭流最高頂·수척두류최고정)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世間塵土不饒君·세간진토불요군)

위 시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고열암 중에게 주다’(贈古涅僧·증고열승)로, 그의 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권 10에 있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42세 때인 1472년(성종 3) 음력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간 지리산 유람을 했다. 유호인·조위·임대동·한인효와 승려 해공·법종, 아전인 옥종과 용상 등과 동행했다. 덕봉사(德峯寺) 승려 해공(解空)이 길안내를 맡았다. 김종직은 이 유람 뒤 유람록인 ‘유두류록(遊頭流錄)’과 11편의 시를 남겼다. 위 시는 그중 한 수이다.

첫날인 8월 14일 함양관아를 출발해 고열암까지 갔다. 고열암에서 첫날 잠을 잤다. 위 시는 이튿날인 8월 15일 고열암을 출발하며 그곳 승려에게 준 시이다. 그날 천왕봉에 오르고 성모당까지 갔다. 사흘째인 16일 통천문을 거쳐 향적사까지 갔고, 17일에는 향적사에서 다시 천왕봉을 거쳐 증봉(촛대봉)과 저여원(세석)으로 해서 영신사에 갔다.

18일에는 영신사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 등구재를 거쳐 함양관아로 돌아갔다. 첫 구에서 고열암 스님과 김종직 자신은 세상 명예와 이익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힌다. 그리하여 속인인 자신과 속세를 떠난 승려가 구분이 안 된다고 했다. 셋째 구와 마지막 구에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올라서면 세상 욕심은 부질없이 느껴질 것이라고 말한다. 위 시를 쓰기 전날 그는 고열암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자면서 ‘고열암에서 자다’(宿古涅庵·숙고열암) 제목의 시를 남겼다. 현재 고열암은 터만 남아있다.

어제 도솔산인 이영규(67) 선생과 통화하였다. 이 선생은 고교 한문 교사를 지낸 분으로, 오랫동안 지리산 각석(刻石) 등을 연구한다. 그를 주축으로 몇 사람이 지리산국립공원공단과 김종직의 550년 전 지리산 유람길을 복원했다. 조만간 그와 필자는 김종직의 유람길을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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