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판에 기댄 나이키…'혁신' 사라지자 추락은 한순간[파워人스토리]
도나호 CEO 재임기간 실적·주가 뚝
'혁신’은 없고 ‘한정판’ 찍어내기 혈안
'올드보이' 내달 복귀…다시 혁신에 승부수
[이데일리 양지윤 기자] “9년차 (나이키) 직원입니다. 매장에서 살 게 없어요.”
지난 7월 국내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신이 나이키 직원이라고 밝힌 이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게시글 작성자는 “직원으로서 신제품 보는 재미도 쏠쏠한데, 최근 3~4년 이렇다 할 제품 내놓은 것도 없고 매번 똑같은 신발, 옷을 찍어 내서 소비자들이 같은 제품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졌다”며 회사의 경영 전략에 불만을 드러냈다.
이 게시물을 본 한 온라인 농구 동호회 회원도 “나이키 신제품에 새로움이나 신선함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최근 러닝 열풍으로 잘 팔리는 제품은 여전히 소량으로 판매, 소비자들에게 피로도가 쌓이고 있다는 걸 회사만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세계 최대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소비자와 투자자들에게 미운오리 취급을 받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실적 부진에 허덕이는 데다, 향후 실적 전망에도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탓이다.
29일 엠피닥터에 따르면 지난 27일(현지시간) 나이키 주가는 전 거래일보다 0.06% 오른 89.4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올 초 주당 100달러 초반이었던 주가는 지난달 초 70달러대까지 밀린 뒤 최근 바닥을 다지고 반등을 시도하는 모습이다.
나이키 주가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극성을 부리던 지난 2021년 11월8일 장중 179.10달러를 찍기도 했으나 코로나 엔데믹(풍토병화)로 전환된 후 상승세가 급격하게 꺾였다. 코로나19로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분출하는 ‘보복 소비’ 열풍이 불면서 조던 등 나이키의 고가 인기 제품들은 리셀(되팔기) 시장에서 높은 몸값을 자랑할 정도로 잘 나갔지만,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나이키의 부진은 실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이키의 지난 4분기(2024년 3~5월) 매출은 126억6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128억2500만달러) 에 견줘 1.7% 감소했다. 이는 시장 예상치(129억700만달러)를 밑도는 수준이다. 주력인 신발 매출은 무려 4%대 급감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코로나 팬데믹 첫해와 2008~2009년 금융 위기를 제외하면 20년 만에 최악의 실적”이라며 혹평을 내렸다.
실적 전망도 어둡다. 2025 회계연도 1분기(2024년 6월~8월) 매출도 10%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때 우량기업의 대명사로 통했던 나이키는 1964년 미국 오리건 대학의 운동선수 필 나이트와 코치 빌 바우만이 설립한 회사다. 당시 회사 이름은 ‘블루리본 스포츠’로, 일본 운동화 브랜드 오니츠카타이거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유통 사업으로 출발했다.
1971년 자체 신발 생산 라인을 구축하며 사명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영어식 발음을 따와 나이키로 바꿨다. 나이키의 상징 로고인 스우시(swoosh·휙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는 의미)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나이키는 도전을 상징하는 슬로건 ‘저스트 두 잇(Just Do It)’과 함께 당시 세계 최고 스포츠 스타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등을 내세워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지난 1985년 출시한 에어 조던 시리즈는 농구화의 혁신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 마케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이키를 나락으로 이끈 건 ‘혁신’이 실종되면서다. 나이키는 ‘혁신적인 기능의 제품으로 극한의 운동선수를 먼저 공략하면 일반 소비자들이 따라온다’는 원칙 아래 제품을 만들어왔다. 가볍고 쿠션감이 좋은 ‘에어 줌’, 탄소 섬유로 만든 ‘플라이 플레이트’ 등을 선보이며 기술력으로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지난 2020년 나이키 50년 역사상 두 번째 외부 출신인 존 도나호 최고경영자(CEO)가 부임한 뒤 브랜드 가치를 지지했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게 월가의 냉정한 평가다. 베인컨설팅과 이베이를 거쳐 나이키의 사령탑이 된 도나호 CEO는 백화점과 스포츠 편집 매장, 이커머스 기업 등 도소매상과 계약을 줄이고, 홈페이지와 직매장을 중심으로 판매하는 전략을 펼치며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는데 소홀했다. 여기에 ‘에어포스1’, ‘코르테즈’ 등 한정판 운동화 판매에만 열을 올리며 신제품 개발이 뒷전에 밀려난 것도 실적 감소의 요인으로 지목된다.
WSJ는 나이키의 전현직 직원들을 인용해 “디지털 판매 확대에 열을 올리다 보니 운동선수들을 위한 최첨단 신발을 만드는 회사라는 근본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진단했다. 이어 “라이프스타일보다 스포츠에 집중하고 혁신에 위험을 감수하는 등 나이키의 성장 동력이 됐던 전략을 차용한 온(On)과 호카(Hoka) 같은 신생 업체와의 경쟁에 직면하게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나이키는 실적 부진을 돌파하기 위해 최근 경영진 교체를 단행했다. 지난 19일 엘리엇 힐 전 나이키 소비자 시장 부문 사장을 CEO로 선임, ‘올드보이의 귀환’을 예고했다.
힐 신임 CEO는 1980년대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임원에 오른 인물로 30년 넘게 회사를 지킨 입지전적 인물로 2020년 은퇴 전까지 나이키와 조던 브랜드의 마케팅 운영을 담당했다. 그는 내달 14일 첫 출근에 앞서 CEO 선임 발표 당일 직원들에게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복귀 소식을 알렸다.
하얀 스우시 로고가 박힌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영상에 등장한 그는 “나이키에서 일하면서 항상 소비자를 중심에 두는 것을 배웠다”며 “혁신적인 제품으로 경쟁사와 차별화 하겠다”고 강조했다. 한정판 제품 판매를 통한 수익 확대 전략을 거두고 고기능성 제품 개발 등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시장 반응은 일단 호의적이다. 데이비드 슈워츠 모닝스타 리서치 수석 분석가는 “이사회는 회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진 힐을 선택해 장기적으로 매출은 성장세를 되찾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시미언 시겔 BMO캐피탈마켓의 선임 애널리스트는 “나이키는 회사 문화와 직원 사기, 도매 파트너십, 그리고 고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CEO 발표로 투자자들로부터 시간을 벌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스토리텔링과 제품의 변화를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양지윤 (galile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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