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핑’ 열풍이 만들어낸 키즈 콘텐츠 산업의 전환점[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파산핑’, ‘등골핑’…. 요즘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 사이에선 이 용어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 TV 애니메이션 ‘캐치! 티니핑’ 열풍으로 생긴 말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요정 티니핑 캐릭터 피규어들을 자녀에게 끊임없이 사줘야 하다 보니 파산에 이를 지경이고, 등골이 휠 것 같다는 의미의 우스갯소리다. 티니핑 종류가 갈수록 늘어나 현재까지 107마리의 각기 다른 티니핑이 등장했다고 하니 부모들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티니핑의 막강한 영향력은 올해 추석 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캐치! 티니핑’의 영화 버전인 ‘사랑의 하츄핑’의 관객 수가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16일 기준 100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100만 돌파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가운데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2012) 이후 12년 만이다. 22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마당을 나온 암탉’(2011)의 기록을 뛰어넘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부모들의 지갑은 가벼워질언정 티니핑 덕분에 한국의 키즈 콘텐츠 산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뽀로로, 핑크퐁 등이 국내외에서 열풍을 일으켰지만 이후엔 마땅한 캐릭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티니핑은 그 뒤를 잇는 것은 물론 한발 나아가 새로운 확장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티니핑이 200마리, 300마리가 될 때까지도 이 열풍이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유이다.
‘컬렉터’가 된 자녀, 지갑을 여는 부모
국내 키즈 콘텐츠 산업은 애니메이션과 해당 작품 속 캐릭터의 발전에 따라 성장해 왔다. 특히 2003년 공개된 뽀로로 애니메이션과 캐릭터가 많은 사랑을 얻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뽀로로에 이어 나온 핑크퐁은 무대를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며 산업의 새로운 성장을 이끌었다. “아기상어 뚜루루뚜루”라는 중독성 있는 노래가 흐르는 ‘핑크퐁 아기상어 체조’ 영상은 2020년 전 세계 유튜브 조회수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6월엔 핑크퐁을 만드는 기업 더핑크퐁컴퍼니의 유튜브 채널 누적 조회수가 1000억 뷰를 넘어섰다. 지구상의 인구가 80억 명임을 고려하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채널의 콘텐츠를 10번 넘게 본 셈이다.
그러나 히트 콘텐츠들의 탄생에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우선 이 작품들의 뒤를 이을 만한 지식재산권(IP)이 잘 보이지 않아 불안이 커졌다. 그렇다고 기존 인기작들에만 의존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영유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수요를 늘리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캐치! 티니핑’은 이 같은 우려들을 잠재우는 콘텐츠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키즈 콘텐츠 인기를 이어갈 새로운 IP이자 한국 키즈 콘텐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캐치! 티니핑’은 2020년 처음 KBS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시리즈이다. 현재까지 시즌4까지 공개됐다. 이 작품은 공주 로미가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요정 티니핑들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사랑의 하츄핑’의 하츄핑 역시 티니핑의 한 종류이다. 로미는 하츄핑의 존재를 우연히 접한 후 자신의 소울메이트가 될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과감히 여정을 떠나고 마침내 하츄핑과 깊은 감정을 나누게 된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이 이야기의 구조엔 전국의 아이들을 들썩이게 한 비결이 숨어 있다.
티니핑 작품들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투영’을 이끌어낸다. 아이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은 로미다. 로미가 긴 여정 속에서 티니핑들을 하나씩 차례로 만날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애정을 주고받는다. 티니핑의 이름에 감정을 직관적으로 담아 아이들이 캐릭터를 쉽게 이해하고 애착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부끄핑, 아자핑, 아잉핑, 시러핑 등이다. 감정 뒤에 ‘핑’을 붙여 부르기 간편하고 귀여운 느낌도 준다. 영화 ‘사랑의 하츄핑’을 본 어린이 관객 중엔 감동의 오열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얼마나 효과적으로 아이들의 감정 이입을 이끌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파산핑’, ‘등골핑’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비결은 스토리에 적절히 버무린 ‘컬렉터’ 설정에 있다. 아이들이 자신을 투영하는 로미 캐릭터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컬렉터라고 할 수 있다. 로미는 다양한 티니핑들을 하나씩 만나 관계를 맺는, 즉 수집을 이어가는 컬렉터에 해당한다. 작품 속에서 로미에 동화되어 이 여정을 함께했던 아이들은 작품 밖 현실에서도 자연스럽게 티니핑 수집에 나서게 된다. 원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아무리 인기가 있다 해도 캐릭터 관련 상품을 꾸준히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그런데 107마리에 달하는 새로운 티니핑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로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들도 지속적인 티니핑 구매를 원하게 된다. 그렇게 컬렉터가 된 자녀를 위해 부모는 지갑을 여는 수밖에.
수집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가격’의 장벽도 다소 낮췄다. 티니핑 피규어 하나를 사는 데는 1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요즘 워낙 고가의 장난감이 많이 나오고 있다 보니 다른 제품들과 비교하면 가격 부담이 크다고 보긴 어렵다. 피규어의 사이즈도 작아서 관리와 보관에도 큰 부담이 없어 부모들은 선뜻 구매를 하게 된다.
세대 확장으로 산업적 한계 극복할까
티니핑 시리즈는 새로운 확장성으로 키즈 콘텐츠의 한계를 정면돌파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이 작품들의 기존 타깃 시청자층은 4~6세의 여아이다. 그런데 여기서 머물지 않고 점차 세대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사랑의 하츄핑’은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장을 찾았던 부모 관객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자녀가 없어도 20, 30대 관객들이 직접 극장을 찾아 작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우정, 사랑, 믿음 등 다양한 소재와 감정을 다루고 있어 어른들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티니핑 시리즈는 키즈 콘텐츠에서 가족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산업은 영유아 중심으로만 형성되어 있고,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는 디즈니, 픽사 등이 만든 글로벌 애니메이션, 캐릭터와의 큰 차이점이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 한국 키즈 콘텐츠 산업이 직면한 수익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티니핑을 만든 SAMG엔터는 올해 2분기까지 5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티니핑을 발판으로 테마파크, 패션, 게임 등 여러 사업으로 확장을 하면서 비용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더핑크퐁컴퍼니는 올 상반기 흑자전환을 이뤄내긴 했으나 지난해엔 적자를 기록했었다.
따라서 키즈 콘텐츠 업체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사업 구조 등을 재정비해 나가야 한다. IP를 활용한 사업 다각화도 중요하지만 세대 확장을 기반으로 수요를 늘린다면 보다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은 시간을 초월하고 상상력엔 나이가 없다. 그리고 꿈은 영원하다.” 디즈니의 창업주 월트 디즈니가 했던 말처럼 이 세상엔 다수의 ‘어른이’(어른+어린이)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와 같은 작품을 보며 순수하면서도 강력한 위로와 희망을 얻고 싶어한다. 티니핑을 비롯한 여러 한국 키즈 콘텐츠가 이 일을 해낸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만큼 폭발적인 구매가 이뤄질 수 있다. 그땐 진짜로 수많은 ‘파산핑’과 같은 현상이 속출하게 되지 않을까.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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