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K팝 걸그룹 시대 글로벌 패권은 어디로?
(시사저널=김영대 음악 평론가)
올해는 K팝이 첫 걸그룹 S.E.S.를 탄생시킨 이래 가장 복잡하고도 다양한 지형도를 펼쳐내는 한 해가 되고 있다. 활동하고 있는 그룹 수 자체도 많을 뿐 아니라 저마다 내세우는 음악적 방향성이나 콘셉트도 제각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가요 시장만이 아닌 글로벌 K팝 시장, 나아가 글로벌 팝 시장의 맥락에서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K팝은 이제 한국에서 출발해 세계로 진출한 아이돌, 세계시장을 위해 애초에 현지에서 출발한 아이돌, 한국이 직접 만들지 않았지만 여전히 K팝의 영향권에 있는 외국 아이돌이 같은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체제로 변해 가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적인 방향성은 다양하긴 하지만 그 안에는 비슷한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포스트-블랙핑크 국면에서 글로벌 걸그룹 시장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이다. 블랙핑크의 건재한 인기와는 무관하게 최근 데뷔하거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룹들의 면면에는 블랙핑크의 DNA가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미묘하게 녹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블랙핑크 후예' 주장하는 두 그룹
블랙핑크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의 새로운 걸그룹 베이비몬스터(BABYMONSTER)와 YG 프로듀서 출신 테디의 회사 더블랙레이블(THE BLACK LABEL)이 처음으로 론칭한 걸그룹 미야오(MEOVV)가 각자의 방식과 전략으로 직속 선배인 블랙핑크(혹은 블랙핑크가 안착시킨 걸그룹의 성공 방정식)를 적극 벤치마킹하고 있는 대표적인 팀들이다.
얼핏 보면 '본가'인 YG가 직접 키워내 선보인 베이비몬스터 쪽에 정통성이 실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블랙이 YG의 음악들, 그중에서도 빅뱅, 투애니원, 블랙핑크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프로듀서 테디의 회사인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정당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쪽은 미야오라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들의 음악이나 비주얼에서 블랙핑크의 뉘앙스를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힙합 비트를 앞세운 차갑고 역동적인 이미지, 럭셔리한 이미지 연출, 어쩐지 익숙한, 다르게 표현하면 복고적인 사운드 메이킹 등 YG와 테디가 만들어온 음악들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들이 유사하게 재현되고 있다. 이미 다섯 곡 남짓의 노래를 공개한 베이비몬스터에 비해 이제 막 첫 싱글을 공개한 미야오의 경우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겠지만 블랙핑크의 제니처럼 랩, 노래, 춤을 동시에 소화해 내는 올라운더들이 주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물론 특화된 포지션 없이 곡에 따라 역할을 넘나드는 것은 최근 아이돌의 경향이기도 하다.
두 그룹 간에는 시장을 공략하는 뚜렷한 전략의 차이도 존재한다. 리사를 통해 블랙핑크가 태국 및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압도적 세를 과시했듯, 베이비몬스터는 외국 멤버들을 통한 현지화 전략의 의도를 숨기지 않는 그룹이다. 베이비몬스터에는 파리타, 치키타 두 명의 태국 멤버가 있고 루카와 아사는 일본 멤버다. 하지만 외국 멤버라는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한국 멤버와의 어울림이 자연스러운데, 이를테면 아사나 루카의 빠른 한국어 랩은 일본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발음도 유창하다.
미야오는 태국 멤버가 없는 대신 두 명의 미국 국적 멤버(가원은 이중국적의 교포, 엘라는 한국계 혼혈로 알려져 있다)와 일본인 멤버 한 명을 보유하고 있다. 블랙핑크에서 영어권 교포 멤버인 로제나 유학파인 제니 등의 포지션을 연상시키는 이들의 존재는 K팝 최대 시장으로 떠오른 미국을 포함한 북미 시장 및 영어권 시장을 겨냥한 행보의 일환일 것이다. 이제 겨우 셀프 타이틀 데뷔곡을 내놓은 미야오지만 데뷔 전부터 미국 굴지의 음반사인 캐피톨레코드와 레이블 계약을 맺었고 유니버설을 통해 미국에 음원을 유통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데뷔 8주년을 넘기고 멤버들이 각각 다른 소속사로 둥지를 옮긴 블랙핑크가 향후 완전체 활동보다는 개인 위주의 활동에 집중할 것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글로벌 K팝 시장에서 블랙핑크가 점하고 있던 위치나 팬덤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려는 기획사들 간 경쟁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창조적 해석과 계승으로 새 시대 예고
블랙핑크의 '직계'는 아니지만 블랙핑크가 갖고 있던 세련미, 걸크러시, 힙합의 요소들을 각기 창조적으로 계승한 5세대 걸그룹들도 있다. 베이비몬스터와 같은 해에 데뷔한 키스오브라이프(Kiss of Life)와 영파씨(YOUNG POSSE)가 그들이다.
이번 여름을 통해 시스타 이후 가장 '핫'한 서머퀸으로 새롭게 떠오른 키스오브라이프는 가창력과 작곡 능력 등 멤버들의 빼어난 음악적 기량과 더불어 트월킹을 내세운 과감한 안무의 디지털 싱글 '스티키(Sticky)'를 앞세워 행복한 여름을 보냈다. 화제성도 화제성이지만 이 팀의 강점은 다름 아닌 음악인데, 파워풀한 안무는 시스타나 블랙핑크 등을 연상시키지만 글로벌한 감각의 세련된 음악은 레드벨벳이나 오마이걸, 혹은 뉴진스와 같은 걸그룹 계보에 놓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키스오브라이프의 성공과 관련해 이 그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이해인의 역할도 주목받고 있는데, 그룹의 콘셉트부터 비주얼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섬세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디자인함으로써 뉴진스를 성공시킨 민희진에 이어 미학적인 감각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여성 프로듀서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영파씨는 매우 독특한 접근법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룹이다. '힙합'을 패션이나 이미지뿐 아니라 음악 전반에 걸쳐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이 그룹은 최근에는 1990년대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시대를 수놓았던 '지펑크(G-funk)'를 들고나와 올드스쿨 힙합 팬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K팝 업계에서 힙합을 끌어안았던 방식이 대개는 유행에 발맞춘 새로운 스타일의 랩이나 비트 같은 개별적 요소의 활용이든지 혹은 '블링블링'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패션 아이템들의 전시에 가까웠다면 영파씨는 시대착오를 유쾌하게 활용해 일종의 시대 패러디와 같은 풍경을 연출하면서도 힙합이 갖고 있는 스토리, 내러티브, 이미지, 음악적 진정성 모두를 정확히 이해하고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만약 K팝이라는 음악 혹은 산업을 국내나 한국인으로만 한정 짓지 않는다면(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XG와 같은, 일본인으로 이루어졌고 일본이 만들어낸, 하지만 범K팝 시장을 염두에 둔 그룹들의 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국제적인 성공의 토대를 갖추고 강력한 팬덤을 확보한 이들의 존재가 의미심장한 건 이것이 새로운 흐름의 '전조'이자 '일견'이기 때문이다.
블랙핑크나 트와이스처럼 세계적인 그룹이 된 K팝 걸그룹의 유산은 그들의 적통을 잇는 한국 그룹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다른 나라의 글로벌 걸그룹에 의해서도 충분히 계승될 수 있다는 상상은 이제는 어느 정도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치 그 옛날 스파이스걸스의 유산을 K팝이 성공적으로 상속해 오늘의 영광을 이루어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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