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만난 '약체' 한국의 짜릿한 반전…'우생순' 전설의 탄생[뉴스속오늘]

이은 기자 2024. 9. 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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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88년 9월 29일 경기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소련을 21-19로 꺾고 대한민국 사상 첫 올림픽 구기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사진=국민체육진흥공단 블로그

1988년 9월 29일.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이날 경기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세계 최강을 꼽히던 소련(소비에트연방)을 21-19로 꺾으며 짜릿한 재역전승을 거뒀다.

여자 핸드볼, 올림픽 첫 출전에 은메달…우승 위해 500일 스파르타 훈련
비인기 종목이었던 한국 여자 핸드볼이 무관심의 설움과 역경을 딛고 이뤄낸 결과였다.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것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였다. 그러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당시 미국, 일본 등과 함께 한국 역시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기로 방침을 정했고, 이에 한국 여자 핸드볼팀의 올림픽 첫 출전도 좌절됐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이후 4년간 갈고 닦은 실력으로 1984년 마침내 출전한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서 단번에 은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첫 출전팀의 은메달 획득은 세계를 놀래키기 충분했다.

당시 한국은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중국에 밀려 원래대로라면 올림픽 본선 출전 티켓을 얻지 못할 뻔 했지만, 마침 소련이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겨우 진출할 수 있었다. 어렵게 진출한 본선에서 한국은 3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대회 2위의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메달이었다.

은메달 쾌거를 이룩한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4년 뒤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큰 기대를 받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회이다 보니 금메달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다른 출전국들에 비해 체격과 체력 모두 열세였기에 선수들은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자동 진출한 한국은 고병훈 감독의 지도 아래 태릉 선수촌에서 500일 동안 스파르타식 훈련을 이겨내면서 대회 준비에 나섰다. 파워 에어로빅과 여자팀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체력을 키웠다.

'세계 최강' 소련 만난 한국, '동점 5번·역전 2번' 접전 끝 금메달
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경기는 참가한 8개국이 4팀씩 2개 조로 나뉘어 예선전을 치른 후, 상위 2개 팀이 결선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한국은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유고슬라비아에 패했지만, 미국을 누르고 4강에 올랐다. 다른 조에서는 소련과 노르웨이가 중국, 코트디부아르를 제치고 결선에 진출했다.

한국은 소련과의 경기 직전까지 우승을 기대할 수 없었다. 조별리그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한 바 있는 데다 당시 핸드볼 세계 최강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선수들은 우리나라 선수들보다 평균 신장이 10㎝나 컸고, 체격은 물론 체력, 경험에서 모두 앞섰다.

그러나 경기 직전 노르웨이가 유고슬라비아를 꺾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한국이 소련을 이긴다면 우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한국 선수들의 투지를 불태우게 한 희소식이었다.

1988년 9월 29일 경기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소련을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사진=국민체육진흥공단 블로그


전력만 놓고 봤을 땐 소련의 일방적인 경기가 예상됐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약체'로 평가됐던 한국이 예상을 뒤엎고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경기 초반 한국은 16-12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후반 중반, 소련의 높은 수비벽에 가로막혔다. 한국이 한 골도 넣지 못한 9분 동안 소련은 5연속 득점에 성공해 17-16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한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임미경의 동점 골로 위기를 넘겼고, 속공과 날카로운 패스로 소련 수비를 흔들었다.

한국의 에이스 공격수 김현미는 경기 종료 6분 전 점프슛으로 18대 18 동점을 만든 뒤, 전광석화 같은 속공 플레이로 두 골을 보태 한국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은 소련과 5번의 동점과 2번의 역전, 치열한 경기를 펼쳤고 경기 막바지 다시 역전에 성공했다. 최종 스코어 21-19로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핸드볼 우승 후 눈물을 쏟는 선수의 모습. /사진=국민체육진흥공단 블로그


경기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리던 순간 선수들과 코치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고병훈 당시 여자핸드볼 대표팀 감독은 "이제 우리 핸드볼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종목이 되겠구나 싶어 자부심을 느꼈고 처음으로 핸드볼 한 보람이 있었다"며 북받친 마음을 전했다.

그는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핸드볼을 크게 인식시킨 것이 기쁘다"며 "우리 선수들이 비인기 종목의 그늘에서도 열심히 훈련한 결과이며 앞으로 실업팀이 많이 생겨 선수들이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감독은 이어 "소련보다 좋은 체격에 스피드까지 갖춘 노르웨이와의 경기를 더 어렵게 생각했으나, 이 경기(소련)에서 이긴 것이 선수들에게 '소련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승리 비결을 전하기도 했다.

이은 기자 iame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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