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땐 소주, 해장은 쌀국수로…아시안 뉴요커들의 출판 분투기

한겨레 2024. 9. 29. 09:05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필리핀에 입국하는 입국카드에 필리핀에 처음이냐고 묻는 질문이 있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월세도 버거운 이들은 전공을 살려 출판사에 취직한다.

실비아는 부자 사장님의 흥미로 유지되는 독립 출판사에, 시린은 학자들의 학문적 저술을 주로 내는 대학 출판부에, 그리고 니나는 단행본을 내는 상업 출판사에 취직했다.

뉴욕 한복판에서 서구 지성을 지탱하는 출판의 한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찜질방 동지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만화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필리핀에 입국하는 입국카드에 필리핀에 처음이냐고 묻는 질문이 있었다.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30년 전에 홍콩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탔다가 마닐라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태풍이 불었고 그 탓인지 비행기가 떨어져 홍콩 공항 활주로가 폐쇄되었다. 폭우와 강풍 속에서 내릴 곳이 없었던 비행기는 마닐라 공항의 허락을 얻어 착륙했다. 마닐라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다시 아수라장이었던 홍콩 공항으로 갔다. 물리적으로 마닐라에 들렀으나, 이 경험을 필리핀을 방문한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기억은 시간의 켜에 묻혀 희미하다. 폭우와 매연 냄새가 뒤섞여 유쾌하지 않은 인상만 남았다.

이번에 방문한 마닐라는 달랐다. 날씨도 좋았고 대기 질도 양호했다. 무엇보다도 활기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다. 얼마 전에 갔던 인도네시아의 젊은이들이 큰 나라, 발전하는 나라라는 자신감을 한껏 드러냈던 것이 겹쳐서 수백년 식민지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식민지배는 어떤 미사여구를 써도 지배국의 이해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식민지에 상처를 남긴다. 지배를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분리 통치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든다. 한때 타이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버마족의 나라가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도, 이 지역이 잠에서 깨어나 힘찬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한국 배우들이 미국 드라마나 할리우드 영화에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 신기하던 시절은 지났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젠 부상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이민들도 함께 출연한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다양한 사람들이 대중매체에 인기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의 주인공은 실비아 바티스타, 시린 얍, 니나 나카무라. 셋은 뉴욕대학교 영문과 동기생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친해진 셋은 한집에 월세를 함께 내면서 산다. 일을 하지 않으면 월세도 버거운 이들은 전공을 살려 출판사에 취직한다.

실비아는 부자 사장님의 흥미로 유지되는 독립 출판사에, 시린은 학자들의 학문적 저술을 주로 내는 대학 출판부에, 그리고 니나는 단행본을 내는 상업 출판사에 취직했다. ‘보조’라는 꼬리표를 단 자리에서 분투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거기에 아래층에 홀로 사는 아흔이 넘은 작가 베로니카 보와의 인연이 얽힌다. 베로니카 보는 젊은 나이에 부커상을 받았지만 이후 작품들은 많은 독자를 얻지 못했다. 그와 이웃사촌으로 친해진 젊은 편집자들이 베로니카의 재발견 프로젝트도 차근히 꾸려간다. 이들은 타이(태국) 식당에서 모여 도원결의를 했고, 힘들 땐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간다. 해장은 쌀국수다. 뉴욕 한복판에서 서구 지성을 지탱하는 출판의 한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찜질방 동지들.

이 책의 원래 제목엔 부커상 수상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부커상이 우리나라에서 독자들에게 파급력이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제목을 바꿨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크기를 80% 정도 줄여 놓았다. 글이 많은 만화라 깨알 같은 글씨를 힘들게 읽었다. 비용을 줄여 책값을 낮추고 많은 독자를 찾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의 크기를 정했을 작가와 출판사의 의도를 한번 더 생각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만화애호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