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에 여러 개의 떼루아를 오롯이... 옴니버스식 구성의 와인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9. 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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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테사 와이너리의 모습. 앞으로는 나파 강, 뒤로는 바카 산이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보면 종종 여러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통합적인 메시지나 주제를 형성하는 방식의 전개를 발견합니다. 옴니버스식 구성(Omnibus configuration)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죠.

옴니버스식 구성은 문학사에서 특정한 시점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서사 기법 중 하나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하지만 이 서술 방식이 대중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이죠.

1914년 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사람들(Dubliners)’은 대표적인 옴니버스식 구성 작품입니다. 주인공으로 15명의 인물이 각각 등장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15개의 단편 소설이 묶인 구조입니다.

15개의 이야기지만 당시 독립을 열망하던 아일랜드 사회의 일상을 각 주인공의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시대상과 인간의 복잡한 심리, 사회적 억압이라는 공통 주제를 묘사합니다. 이 때문에 현대 문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110년 전 유럽에서 출간된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 소개할 와인이 옴니버스식 구성의 대표 소설인 더블린사람들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나파 밸리의 컬트 와인 중 하나로 꼽히는 퀸테사(Quintessa) 입니다.

나파밸리 러더포드에서 양조하는 퀸테사. 110헥타르 부지에서 오로지 퀸테사 와인 한 가지만을 양조한다.
한번도 경작되지 않은 깨끗한 땅
퀸테사는 1989년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의 러더포드(Rutherford)에 문을 연 동명의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 입니다. 와이너리는 나파 밸리를 흐르는 나파 강과 바카 산 사이의 너른 언덕에 위치합니다.

110헥타르(㏊) 가까이 되는 부지 중 65헥타르에서만 포도를 재배합니다. 숲과 호수로 이루어진 나머지 45헥타르 가량은 자연과의 공생, 선순환을 위해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곳이 1989년 창립자인 오귀스틴(Agustin)과 발레리아(Valeria) 후네아스(Huneeus) 부부가 포도를 식재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경작되지 않은 땅이라는 점입니다. 퀸테사의 와인 메이커인 레베카(Rebekah Wineburg)는 “한번도 경작되지 않은 깨끗한 땅”(This is pristine land has never planted)이라고 표현합니다.

땅에는 지력(地力)이라는, 농작물을 길러낼 수 있는 힘이 존재하죠. 단 한번도 경작되지 않은 땅이니 와인의 원재료가 되는 포도에서부터 풍부한 양분과 다양한 복합미를 기대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와이너리 창립자인 오귀스틴과 발레리아 후아네스 부부.
다섯 곳에서 수확한 포도
퀸테사는 라틴어로 다섯을 뜻하는 퀸트(Quint)와 수확자를 뜻하는 테사(Tessa)를 합친 합성어 입니다. 직역하면 ‘다섯 수확자’ 정도로 해석되는데요. 와인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직관적인 이름입니다.

와이너리는 포도를 재배하는 65헥타르의 부지의 토양을 5개 정도로 구분합니다. 와이너리가 자체적으로 구분하는 떼루아는 26가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충적토가 쌓인 강 주변의 토양부터 자갈과 화산재가 많이 섞인 언덕배기 토양까지 각자 독창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재배된 포도는 같은 품종이더라도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죠.

현대 와인 시장에서 가장 비싼 와인 산지를 고르라면 대부분이 꼽을 부르고뉴는 이런 떼루아의 특징을 극한으로 구분했습니다. 지방을 지역으로, 지역을 마을로, 마을을 밭 단위로, 쪼개고 또 쪼개서 차이점을 나누고 그 차이에 값어치를 매겼습니다. 이러한 쪼개기가 시장의 선택을 받으면서 지금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고요.

하지만 퀸테사는 부르고뉴의 성공 방정식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자기 와이너리 내 20여가지가 넘는 떼루아가 있음에도 오히려 서로 다른 스타일의 포도로 와인을 양조하고 이를 블렌딩한 것 입니다.

퀸테사 와이너리에 분포한 다섯 개의 대표적인 지질.
여러 떼루아를 한 데 모은 와인
퀸테사의 이러한 전략은 와이너리의 철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레베카씨는 “퀸테사는 드넓은 지역의 여러 떼루아를 모아 그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단 한 가지의 와인을 만드는 데에 집중한 결과물”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소설 ‘더블린사람들’처럼 각자 개성과 이야기가 있는 캐릭터를 한 가지 주제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갈무리한 셈입니다.

실제로 시음한 2021 빈티지 퀸테사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캐릭터를 함축해놓았습니다. 나파 밸리 러더포드 지역 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입자가 고운 타닌감, 일명 ‘러더포드 더스트’는 물론이고, 잘 익은 검은과실과 붉은과실, 라벤더와 같은 허브의 뉘앙스가 골고루 나타났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발사믹 뉘앙스와 달큰하면서도 쌉쏘름한 매력이 있는 스타아니스(팔각), 오크통으로부터 나타나는 바닐라 풍미도 느껴졌는데요. 이제 갓 숙성을 끝낸 어린 와인이 이렇게 넓은 범위에서 복합적인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은 축복에 가깝습니다.

이는 단순히 여러 캐릭터를 가진 와인을 섞는 것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고, 와이너리의 노력이 곁들여진 결과물입니다. 실제로 와이너리는 각 떼루아의 다양한 캐릭터를 단 한 가지 와인에 함축하기 위해 테라코타 암포라 등 다양한 방안을 연구해 양조에 적용했다고 합니다.

퀸테사 와이너리.
단순하게 맛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퀸테사는 수백년된 유럽의 와이너리들은 물론 100년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나파 와이너리들과 비교하더라도 굉장히 짧은 30년에 불과한 역사의 덕도 봤습니다. 요즘 트렌드인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에서 앞장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포도밭에 양떼와 소떼를 풀어 키우는 것 입니다. 이들이 키우는 양과 소는 포도밭에서 자라는 잡초와 커버크롭(Cover crop·지피식물)을 먹어치웁니다. 게다가 이들의 분뇨는 자연 퇴비가 되기도 하죠.

레베카씨는 “퀸테사는 층층히 겹쳐있는 풍미와 파워, 우아함을 모두 가진 와인”이라며 “단순하게 맛있는 와인이 아니고, 떼루아를 잘 표현하는 와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퀸테사 와이너리에서 방목해 키우는 소들.
에피퍼니를 느끼게 해줄지도?
앞서 소개했던 소설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서는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경험하지만 생소한 개념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에피퍼니(Epiphany) 입니다.

에피퍼니의 사전적 정의는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 혹은 자각’인데요. 과학적으로 획기적인 성과나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발견을 묘사할 때, 또는 어떤 문제나 현상을 더욱 새롭고 깊은 관점에서 이해했을 때의 계몽적인 깨달음을 경험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 입니다.

예컨대 일상에서 소소한 깨달음이나 간단한 통찰을 얻는 순간, 우리는 ‘에피퍼니를 느꼈다’고 표현합니다. 더블린사람들 소설 속 각 단편 속 인물들이 현실의 삶에 천착해 살아가다가 에피퍼니의 순간을 통해 삶과 한계를 자각하게 되고, 이 자각들이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됩니다.

퀸테사는 최근 십수년 간 주류로 군림했던 와인들에 익숙해진 와인 애호가들에게 에피퍼니를 느끼게 해줄 와인입니다. 역사가 깊고 섬세한 복잡한 와인이 트렌드로 인정 받는 시대에 ‘좋은 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대전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와인이죠.

어느 덧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훌쩍 지나가고 아침 저녁으로 쌀쌀함이 느껴지는 가을이 왔습니다. 샴페인과 화이트 와인만 주구장창 마셨던 더위가 지나가는 이 시기, 오랫동안 잊었던 레드 와인과의 만남을 퀸테사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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