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젠더 감성 반영…꿋꿋한 삼순아 반가워

한겨레 2024. 9. 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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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제공

200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한 미투 운동은 사안의 심각성만큼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한국 역시 2010년대 중반부터 문화예술계를 필두로 정치계의 미투 관련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성인지 감수성’이 화두가 되었고, 사적 영역의 문제로 치부하던 연인 사이 폭력을 ‘데이트 폭력’과 ‘교제 살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생존을 위협하고 인격을 말살하는 위해 요소는 여전하지만, 더디어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미투 운동은 청춘 남녀의 낭만적인 연애와 열정적인 사랑을 다룬 로맨스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랑을 빙자한 폭력을 박력으로 미화하는 장면은 보기 어려워졌다. 연애와 사랑의 대체재라는 로맨스 드라마도 세상의 변화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여년 만에 감독 편집본으로 돌아온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웨이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여자 주인공의 젠더 감성의 변화를 견인할 정도로 획기적이었던 김삼순(김선아)은 여전하다. ‘서른 살 노처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백마 탄 왕자’처럼 이미지 연출됐던 현진헌(현빈)은 사랑의 감정 표현이 서툰 연하남으로 달라졌다. 레스토랑 사장이자 어머니의 호텔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라는 왕자 이미지는 그대로이지만, 3년을 기다렸던 첫사랑 유희진(정려원)과 김삼순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연하남 애인으로 행세하며 김삼순의 맞선을 방해하는 행동은 ‘귀여운 박력’이 아니라 일방적 폭력일 뿐이다.

젠더 감성을 고려해 전체 16부작을 8부작으로 새롭게 편집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실연당한 호텔에서 맞선이라니, 정말 삼순이스러워”라는 현진헌의 혼잣말은 김삼순을 향한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암시하는 복선으로 해석하기 어려워졌다. 그의 언행은 ‘김삼순’이라는 이름을 우습게 생각해서 하찮게 대하는 부잣집 아들의 오만한 태도일 뿐이다. “오늘 네가 날 짓밟았어. 그것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말이지”라는 김삼순의 항변도 치기 어린 투덜거림이 아니라 좌절에서 비롯한 명확한 의사 표현이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많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소망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는 울분으로 들린다.

문화방송 제공

시대를 앞서간 김삼순의 매력은 여전하다. 그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사랑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첫사랑의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현진헌도 김삼순 덕분에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했다. 김삼순은 여성에 관한 사회적 편견에 균열을 일으켰고, 여성의 사회적 위상 강화에 이바지했다.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한 덕분이다. 서른살 그의 인생에서 일과 사랑이 충돌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다. 낭만적 연애와 열정적 사랑의 힘이다. ‘김삼순 선발대회’가 열릴 정도로 화제였던 김삼순의 귀환이 반가운 이유다. 온갖 종류의 자기계발서가 유행해도 자기 주도적 삶을 살기 쉽지 않은 요즘, 다시 한번 ‘김삼순 신드롬’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도 크다.

다만, 김삼순도 결혼에 관한 생각만큼은 세월을 거스르지 못한 듯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인생 뭐 별거 있냐?”는 조언대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투덕거리며” 살고 싶어 하는 소박한 바람은 작금의 비혼주의 세태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도 김삼순의 결혼관이 낡은 것인지, 결혼과 출산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풍토가 문제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데이트 폭력’과 ‘교제 살인’에 대한 공포가 엄연한 현실에서 “내 말만 듣고, 나한테만 귀 기울여”라는 사랑의 속삭임을 의심해야 하니, 결혼은 언감생심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위협받을 만큼 경제적 여건이 악화하면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했던 3포세대가 절규하듯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을 외치는 세상이라 더 그렇다.

김삼순을 처음 만난 이후, 강산은 두번 바뀌었고 세상도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삶의 고달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늘고 있다. 먹고사는 게 쉽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탓이 크다. 무한생존 경쟁을 내면화한 세상이기에 각자도생을 강호의 도리로 여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세상이 정상일 리는 없다. 김삼순은 ‘김희진’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이름을 바꿔 삶이 달라진 사람도 있지만, 김삼순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지혜를 깨달았다. 미투 운동으로 로맨스 드라마는 달라졌지만, 자신에게 충실하되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고 울먹이던 김삼순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게 쿵쾅거린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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