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살을 잡을 수 없다면 머리채를 잡아라”

한겨레 2024. 9. 2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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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싸움의 기술
남자들 싸울 때 웃통 벗는 이유
옛 조폭들 온몸에 용 문신 화려
MZ 조폭은 SNS에 슈퍼카 과시
게티이미지뱅크

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옆 테이블과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벌인 사건을 조사할 때였다.

“시시티브이(CCTV) 보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으시더라고요. 왜 그러신 거예요?”

남자는 그 순간의 분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원래는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상대방이 웃통을 벗어던진 겁니다. 멱살을 잡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머리채를 잡아야지.”

내 질문은 그게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서 상대방을 먼저 공격했냐는 뜻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왜 머리채를 잡았느냐’로 이해한 모양이다(물론 질문을 애매하게 한 내 잘못이 크다). 멱살을 잡지 못하고 머리채를 잡고 싸운 것이 못내 아쉽다는 듯, 남자는 억울함과 민망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뒷돈 갈취에서 범죄사업으로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남자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오래전부터 내심 궁금했던 의문, 왜 수많은 남자들이 싸울 때 웃통부터 벗어던지는가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멱살을 잡히지 않기 위해 웃통을 벗어던진 것이었다. 이전에는 그저 자신의 몸매나 문신을 과시하려고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문신도 없고 몸도 좋지 않은데 웃통을 벗어던지는 남자들도 꽤 있어 좀 의아하기는 했다. ‘혹시 열이 나서 더워서 그러나?’ 정도 생각해보았지, 그렇게 전술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조사를 마치고 나의 깊은 깨달음을 옆에 있는 수사관에게 말했더니 그는 그걸 여태 몰랐냐는 듯이 말했다.

“검사님 멱살 안 잡혀 보셨죠? 보통인들의 싸움은 멱살 잡히면 끝나는 겁니다.”

검사가 되고 나서 수없이 많은 보통인의 싸움을 영상으로 봤다. 주점과 도로와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영상이 내 책상 위에서 재생되었는데, 보통인들의 싸움 중에 영화에서처럼 그럴듯하게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휘젓는 팔과 다리가 유효하게 상대방의 신체에 가닿는 경우나 그걸 그럴듯하게 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로 멱살을 잡고 옥신각신하다 제풀에 넘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인의 싸움에서는 멱살을 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면 일단 웃통부터 벗고 보는 것이었구나. 크게 멱살을 잡혀본 적 없이 살았던 검사 인간의 좁은 식견이 쩌억 소리를 내며 조금 넓어졌다. 역시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인간이 저지르는 갖가지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내친김에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식을 확장시켜 보자. 술을 마시다가 옆자리가 시끄러워서, 운전을 더럽게 해서, 차를 빼달라고 하는데 눈을 부라려서 충동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보통의 인간들보다는 좀 더 비즈니스적으로 자주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조직폭력배의 경우라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자주 멱살을 잡히지 않기 위해 더 자주 웃통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자주 상반신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다른 곳이 아닌 등판에 문신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제야 과거로부터 등판을 뒤덮은 거대한 문신이 조폭의 상징이 되게 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 모든 문화는 실질적인 필요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요즘 ‘엠제트(MZ) 조폭 사건’ 전문으로 활약 중인 강력부장 검사와 논의를 해봤다. 강력부장은 어느 정도 나의 이론에 동의하면서도 요즘에는 조폭이라고 해서 다 문신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원인이 아마도 과거와 다른 조직폭력배의 사업 양상에 있지 않겠느냐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조폭들이 유흥업소나 도박장의 뒤를 봐주면서 활동비를 받아 돈을 버는 구조로 사업을 했다면, 요즘 조폭들은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조직, 대포통장 조직, 사이버 도박 사업 등에 직접 뛰어들어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갈취하는 형태로 일할 때보다 웃통을 벗어던져야 하는 경우가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등판에다 문신을 뒤덮을 이유가 별로 없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강력부장이 생각하기에 문신의 유무, 크기보다는 그 퀄리티가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급이 높을수록, 돈이 많을수록 실력이 좋은 문신 시술자에게 질 높은 문신을 받게 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자신이 만난 안타까운 조폭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는 나름 규모가 있는 조직의 중간 보스쯤 되는 조폭이었는데, 몸에 커다란 용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용 문신이야 이 세계에서 흔한 것이지만 허벅지에서부터 시작해 옆구리를 타고 휘돌아 등판으로 이어지며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용의 자태가 남달랐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대단한 공력의 문신 시술자가 장기간 혼을 불어넣어 작업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결정적인 흠이 있었으니, 포효하는 용의 눈동자가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이거 어디서 듣던 스토리인데?)

화룡점정 빼먹고 잠적한 업자

사연을 들어 보니, 허벅지부터 시작해 비늘 한땀 한땀 새겨 올라가 마침내 눈동자만 그려 넣으면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문신업자가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조폭은 잠적한 문신업자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미처 그를 잡지 못하고 검거되었고, 끝내 눈동자를 완성하지 못한 미완의 용과 함께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다. 한땀 한땀 살을 파고드는 고통을 견디고 누구보다 형형한 용의 눈동자를 완성할 때쯤이면 조직의 1인자는 몰라도 2인자쯤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의 꿈도 그렇게 중단되었다.

이것만 해도 전통적인 옛 조폭 시대의 이야기다. 요즘 조폭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문신보다는 에스엔에스(SNS, 소셜미디어)를 봐야 한다고 강력부장은 말한다. 등판에 용이나 호랑이 따위를 새기는 대신, 에스엔에스에 슈퍼카와 명품 시계를 올리는 방식으로 그들만의 허세를 전시한다. 이제 막무가내의 폭력적 몸뚱이보다 젊은 나이에 쉽게 손에 넣은 과시적 자본이 더 무섭고 매혹적인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를 선망하는 젊은이들이 대포통장 모집책으로, 사이버 도박 자금 세탁책으로, 가짜 전세 사기 대출꾼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시대에, 그 허황된 욕망의 멱살을 어떻게 잡아 앉힐 수 있을까? 웃자고 시작한 이야기 끝에 문득 고심이 깊어지는 강력부장에게 보통인의 싸움의 기술 한 자락을 넌지시 던져본다.

‘멱살을 잡을 수 없다면 머리채를 잡아.’

부산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9년차 검사 정명원이 일하면서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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