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게 집게발처럼 허우적거리며 썰매를 탔다

한겨레 2024. 9. 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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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남극의 비닐 썰매
백두봉 정상서 태극기 휘날리며
수십장 기념사진…황홀한 풍광
내려올 땐 비닐 깔고 미끄럼타기
독특한 지형 보며 의기양양 귀환
남극 백두봉에 오른 우리는 빙판과 얼음 녹은 물이 흐르는 루트를 선택해 내려왔다. 때론 아이처럼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극지연구소 민준홍 제공

“컵라면 드실 건가요?” 월동 천사가 벡터에게 정중히 물었다. 해발 250미터의 남극 백두봉, 벡터와 나는 바람에 날려갈까봐 암석에 바짝 붙어 있었다. 물론 늑대염과 월동 천사는 훨씬 여유로웠지만. “아니야, 컵라면은 어림도 없을 것 같아. 면발이 날아가겠네.” 이런 줄도 모르고 간식을 챙겨 온 우리가 한심해서 벡터와 나는 깔깔 웃었다. 정상에는 태극기함도 있었다. 전문 등반가들처럼 태극기를 들고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으려는데 함이 비어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준비성 철저한 월동 천사가 배낭에서 태극기를 꺼냈다. 우리는 수십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지에서 이 배낭을 발견했어요.” 배낭끈에는 엘 박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1997년부터 남극에 일곱번 오간 엘 박사가 언젠가 기지에 남겨뒀을 배낭을 월동 천사가 찾아냈고 그걸 메고 백두봉을 오른 것이었다.

세종기지의 역사란 이런 것이 아닐까. 지구를 돌고 돌아 온 사람들의 일상이 쌓인 흔적들. 그렇다면 나 역시 남극 백두봉에 오른 최초의 작가로 (아마도 최장 시간이 걸린 주인공으로) 남겠지. 행복감에 젖어 있는데 체온이 떨어지니 이제 내려가야 한다고 늑대염 대원이 권했다. 그리고 하산에는 두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죽을힘을 다해 올라온 같은 길과, 빙설이 깔려 있는 반대쪽 경사면. “다른 길로 가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택했다. 믹스커피 한잔으로 몸을 데우고 바람의 지나친 포옹을 받으며 하산을 시작했다.

놀이 없는 운동은 물렀거라

남극 백두봉에 오른 우리는 빙판과 얼음 녹은 물이 흐르는 루트를 선택해 내려왔다. 극지연구소 민준홍 제공

세종 기지가 자리한 킹조지섬은 남셰틀랜드 군도에 속하는 화산섬이다. 아직도 이 일대에서는 규모 4.0에서 5.0에 이르는 지진이 일년에도 수백번 일어난다. 그건 남극이 아직 ‘되어가고’ 있는 장소라는 증거다. 완전히 동결된 땅이 아니라 언제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그렇게 해서 지구의 미래를 조정해가는 뜨거운 대륙. 자갈밭을 조심조심 내려가 우리는 얼음 비탈에 섰다. 벡터가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썰매처럼 타고 얼음 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금융계 종사자라 철저하군, 나는 감탄했다.

늑대염 대원은 굳이 미끄럼을 타지 않아도 조심히 걸어가면 된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벡터의 방법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비탈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꽃게 집게발처럼 휘두르며 눈길을 내려갔다. 마음만큼 속도도 안 나고 무엇보다 모양이 빠졌지만 이렇게 노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엉덩이를 대고 미끄럼을 타며 아이처럼 내려오는 일. 결국은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겠지만 내가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느라 어스름 저녁이 되어야 집에 들어가던 나는 움직이기 싫어하는 어른이 되었다. 물론 정기적으로 운동을 했지만 (적어도 내게) 그건 놀이가 아니었다. 규칙과 장소와 복장이 정해져 있고 더 옳고 바른 자세가 있으며 무엇보다 돈이 들었다. 그렇게 놀지 않게 된 내가 남극에서 다시 노는 어른이 된 것이다.

비탈면이 끝나고 눈 녹은 물이 흐르는 아라온곡을 따라 걸었다. 빙하 녹은 물을 마셔보고 싶었지만 카밀라 언니의 당부가 떠올라 참았다. 남극 얼음으로 빙수를 만들고 칵테일을 타 마셨다는 낭만적인 경험담은 옛일이고 최근에는 거기에 수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져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더구나 98퍼센트는 (사실상 전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니까. 현대의 항생제나 면역제에 내성을 지닌 미생물들이 물을 따라 흐르다 인체에 들어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절반쯤 내려왔을 즈음, 월동 천사가 “여기 그라운드 서클이 있네요!” 하며 땅을 가리켰다. ‘구조토’(構造土)라 불리는 그 독특한 지형은 얼음의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면서 큰 자갈이 바깥 테두리를 이루고 작고 미세한 돌들이 안으로 모이는 극지방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마치 벌집의 육각형 모양처럼도 느껴졌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이라 한참을 구경했다. 아라온곡의 길은 우리 팀 아지트인 케이지엘투(KGL2)와 이어졌다. 동네 골목길에 들어선 듯한 편안함이 들었다. 등반이 끝났다는 안도감으로 기운이 바짝 났고 얼른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빠르게 생활동으로 달려갔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잘 다녀왔느냐고 반겼고 카밀라 언니는 수고했다며 심지어 안아주었다. 남극점이라도 정복하고 온 듯한 의기양양한 귀환이었다. 엠 박사가 풍경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나는 황홀한 눈빛으로 답했다.

“정말요?”

엠은 반신반의하며 한번 다녀와야 하나? 고민했다. 저녁 메뉴인 삼겹살 수육을 냉면에 싸 먹으며 나는 가능한 화려한 문학적 수사를 활용해 풍광을 묘사했다. 그 고된 등산길의 기쁨을 나만 누릴 수는 없으니까.

남극 돌풍에 날아간 독자 편지

극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원형 무늬의 구조토. 극지연구소 민준홍 제공

다음날, 기상 예보가 ‘활동 위험’이라서 주로 드라이랩과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를 마시고 싶어하는 엠 박사에게 비행기에서 집어 온 티백을 건네고, 엘 박사에게 분말 라떼 커피를 선물했다. 둘 다 좋아해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소소한 간식거리라도 기지에서는 어느 호텔 식당의 디저트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간식 선반이 새로 채워지면 행복했고 반대로 점점 비워져가면 조바심이 났다. 특히 새우깡이 그랬다. 하나씩 집어먹으며 글 쓰는 것이 남극에서의 작업 방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밤이 되자 바람은 더 거세어졌다. 그걸 고려하지 못하고 여느 때처럼 씻고 돌아왔을 때 갑자기 창문이 쾅 열리며 돌풍이 안으로 몰아쳤다.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조금 열어둔 게 문제였다. 창가 물건들이 방바닥으로 몽땅 떨어졌고 몇몇은 날려갔다.

그중 하나가 제이(J) 대원이 전해준 독자 편지여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댔다. 찾으러 나간다고 남극풍이 편지를 어디까지 가져갔는지 알 수도 없고 그냥 두자니 편지가 아까웠다. 창가에 비치된 간이 완강기함이 떨어져 내릴 정도의 큰바람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사고였지만 나는 한동안 찾으러 갈까 말까 갈등했다. 완강기함을 들어보니 모서리 끝이 깨져 있었고 다행히 편지 중 하나는 남아 있었다. 날려간 편지는…… 남극에 남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러면 거기 담긴 응원과 당부, 그리고 호의를 읽게 되겠지, 자책 말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특수부대원 ‘카리스마’의 단호함

전문성이 필요한 월동 대원은 기관 파견을 통해 뽑고 있었다. 해군 해난구조대(SSU)에서 파견된 칼 대원이 조디악을 몰고 있다. 김금희 제공

월동 대원 중에는 특정 기관에서 파견된 이들도 있었다. 기상청에서 온 기지 기상청장과 해군 해난구조대(SSU)의 ‘칼있으마(카리스마)’ 대원이었다. 특수 부대원이라니, 고무보트관리동으로 찾아가 첫인사를 할 때 나는 좀 긴장했다. 만나보니 입남극 때 “장갑 없어요?” 하며 나를 챙겨준 분이었다. 같이 지내보니 칼 대원은 섬세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작업을 하거나 운동할 때, 그리고 회식할 때 분위기를 이끌면서 누가 소외되지 않나 살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매해 월동 대원을 선발할 때마다 지원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내와 딸이 허락해주어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는 특수부대 출신답게 나의 적극성을 독려하기도 했다. 남극에 왔으니 조디악을 타고 남셰틀랜드 군도의 섬들을 하루 종일 돌아봐야 한다고 성화였다. 김밥을 싸서 소풍하듯 돌면 된다고. 아무리 조디악에 익숙해졌어도 원거리를 타고 이동할 자신은 없었다. 빙하가 우뚝 서 있고 유빙이 둥실 떠다니는 남극해에서 펭귄들의 섬을 바라보며 먹는 김밥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기는 했지만 상상만으로도 눈물겨웠다. 하지만 그건 분명 거절할 게 빤한 나를 놀리려는 장난이었고 실현되지는 않았다. 기지의 유일한 이동 수단인 조디악과 소형 선박을 몰고 관리하느라 칼 대원은 항상 바빴으니까. 그런 장난기 많은 칼 대원의 ‘카리스마’를 목격한 장면이 있었다. 회식 날 외국 과학자 하나가 분위기에 취해 조디악을 타고 밤의 바다로 나가자고 한 것이었다. 그는 “안 돼!” 하고 (한국말로) 소리치고는 술자리를 바로 떠버렸다. 안전에 관해서는 어떤 농담이나 객기도 용납하지 않는 신념이 엿보였다.

드디어 인터뷰 날 아침, 칼 대원과 함께 조디악을 타고 나갔다. 식생팀을 포터 소만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원래는 나도 함께 움직여야 했지만 배웅만 하고 돌아왔다. 엠과 엘 박사, 벡터를 내려놓고 돌아오는데 나 없이 잘할 수 있나 (물론 내가 없으면 더 잘하겠지만) 싶으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칼 대원이 잠깐 운전석 옆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항상 운반되는 짐처럼 고무보트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자 나 자신이 남극해와 조금 더 동등해지는 듯했다. 조디악이 파도를 타넘는 힘이 발끝으로 전해졌고 빙산 위에서 쉬고 있는 남극가마우지의 형체가 닿을 듯 가까이 보였다.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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