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북한 인민의 해방이란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7회>
칸트의 “영구평화론”: 평화적 공존의 기본 조건
“미래의 전쟁을 위해 군비를 은밀히 남겨둔 채로 체결하는 평화 조약은 절대로 유효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조약이란 기껏 적대적 행위의 일시적 중단일 뿐, 평화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은 근세 서유럽 계몽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1795년에 발표한 “영구평화론”의 첫 두 문장이다. 칸트의 말대로 두 나라가 영구 평화의 조약을 체결하려면 완전한 신뢰 위에서 모두 동시적으로 비무장을 이뤄야만 한다. 양국 모두 완전한 비무장을 이루지 못한다면 계약서에 어떤 규약이 적시되더라도 평화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무력을 독점한 독재자는 언제든 기존의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조건 위에서 두 나라 사이에 서로 동시에 무장을 해제할 수 있을 만큼의 큰 신뢰가 생겨날 수 있을까? 칸트는 그 제1의 조건으로 양국의 시민사회가 모두 공화주의적(republican) 헌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가 말하는 공화주의적 헌법이란 1) 인간으로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를 보장받으며, 2) 시민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공동의 법제에 의지할 수 있고, 3) 시민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이 보장되는 주권재민의 법제를 이른다. 오늘날의 용어로 풀자면, 바로 입헌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자유민주적 국가들 사이에서만 영구 평화의 조약이 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민 개개인이 독립적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여 정부를 감시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열린 사회는 합리적으로 전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며, 그러한 국가들 사이에서만 실질적인 평화협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229년이 지났건만 ‘영구평화론’에 담긴 칸트의 혜안은 갈수록 빛을 더해가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유지하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장기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이미 인류는 80년 가까이 익숙하게 보아왔다.
비근한 일례로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8891킬로미터)을 맞대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를 보자. 양국은 1812년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사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미 4100만을 넘었다지만 현재 캐나다의 인구는 미국 인구의 11~12%에 불과하다. 미국은 수천 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이지만, 캐나다는 군사비로 국내 총생산량의 2%도 사용하지 않아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로부터 군비 증강을 요구받는 군사적 약체이다. 그럼에도 미·캐 전쟁의 발발을 예상하는 군사 전문가는 없다.
양국은 나토 회원국으로 장기적인 동맹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해 왔으며, 최대 교역국으로서 경제적 유대가 강할뿐더러 공동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과 캐나다는 모두 자유, 민주, 인권, 법치 등 범인류적 보편 가치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적 체제의 국가이다. 양국 모두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구성원 모두가 국가의 법제에 따라 보호받으며, 평등의 원칙을 구현하는 칸트가 말하는 공화주의적 헌정 체제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덕분에 미국과 캐나다는 200년 넘게 평화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북한과의 평화적 공존은 왜 불가능한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비춰보면, 북한과 2개의 다른 국가로서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자는 정세현·이종석 등 지난 정권의 통일부 장관들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주장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청맹과니의 몽상에 불과하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에 가서 북한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선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는데, 이 역시 북한 체제의 위험성을 간과한 섣부르고, 성급하고,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북한은 인민 개개인이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으며, 법에 의지할 수도 없는 실로 보기 드문 불량국가(rogue state)이기 때문이다. 국명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 뿐 북한은 세습 왕조가 지배하는 공산 전체주의 체제다. 굳이 칸트의 지혜를 빌리지 않아도 북한과 같은 나라와는 아무리 그럴싸한 평화 조약을 맺어도 그 조약이 절대로 오래갈 수 없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에 현혹당한 남한의 종북 세력을 제외한다면 정상 국가의 그 누구도 북한이란 불량국가의 대외 조약을 신뢰할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따라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갖춰져야만 한다. 첫째 조건은 영구적이고(permanent), 전면적이고(complete), 검증-가능하고(verifiable), 불가역적인(irreversible) 김씨 왕조의 비핵화이며, 둘째 조건은 70년 넘게 김씨 왕조의 가혹한 지배 아래 놓여 있었던 북한 인민의 해방이다.
인민을 억압하는 핵 가진 북한과 더불어 두 개의 별개 국가로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평화주의자의 천진난만한 몽상이 아니라면 종북 세력의 음험한 계략일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인구의 10% 이상을 노예로 삼은 세계 최악의 노예 국가 북한의 김씨 왕조가 핵무기를 그대로 보유한 채로 대한민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론”에 공조하며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고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 조항을 바꾸자”(임종석)거나 “그 길밖에 없다”(정세현)거나 “정상적인 두 개 국가가 됐다가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이종석)고 외쳐대는 지난 정권의 실세들에 대해선 딱 한 마디면 족할 듯하다. “바보야, 문제는 북한 인민의 해방이란다!”
“미제를 몰아내는” 통일에서 “북핵을 인정하는 반통일”로
1989년 6월 30일 임수경은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여하기 위해서 독일을 거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당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에서는 통일은 곧 좌경이고 용공입니다. 미국과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 듯이 발광을 합니다.”
임수경은 7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했다. 이어서 그는 7월 21일부터 7월 27일까지 30개국 270여 명이 참가하는 “국제 평화 대행진”에 참여했다.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사리원, 신천, 개성을 거쳐 판문점까지 가는 7일간의 행진 이벤트였다. 행진이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25일 임수경은 기자들 앞에서 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 땅에서 45년간 우리 민족에게 범행을 저질러온 미국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다음 순간 임수경은 오른팔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조국 통일 가로막는 미국 놈들 몰아내자.”
“미국과 노태우 일당”에 대해선 거침없는 막말을 퍼붓고 미국을 민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 집단으로 매도한 임수경은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들이 오매불망 존경하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만났을 땐 대뜸 안기면서 손을 꼭 부여잡고 서 있는 애틋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 순간 77세 김일성과 22세 임수경의 만면엔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김일성이 누구인가? 1950년 스탈린의 인가 아래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하고서 기습적으로 6·25전쟁을 일으킨 민족사 최악의 전범이다. 또한 그는 수많은 군사도발을 자행하며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위협한 공산 전체주의 정권의 수령이자 북한의 전 인민을 정신적으로 노예화한 잔혹한 독재자이다. 1980년대에도 그의 군사 테러는 계속되었다. 김일성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로 대한민국의 각료와 수행원 17명을 살해하고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에 폭탄 테러를 가하여 115명의 인명을 학살한 주범이다.
임수경은 김일성의 실체는 전혀 몰랐던 듯하다. 당시 대학가 주사파 운동권 사이에선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으로 떠받들며 “장군님”이란 극존칭으로 지칭하는 반역의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그런 시대착오적 반역(反逆)의 풍조에 푹 빠져 있었기에 북으로 간 임수경은 기자들 앞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미국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45년간 우리 민족에게 범행을 저질러온” 악의 세력으로 매도할 수 있었다. 임수경은 대한민국에서 나서 자랐지만, 그 당시 그의 머릿속은 조선노동당 중앙선전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대한민국은 김씨 왕조에 복무한 반국가 세력에 대해서도 넓고도 따듯한 자유민주적 도량을 베풀었다. 임수경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고 국회로 입성할 수 있었는데, 2012년 6월 4일 탈북자들을 향해서 “배신자 XX들 북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막말을 내뱉어 구설수에 올랐다.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자유를 찾아서 북에서 탈출한 탈북자들이 “김일성 수령의 교시”를 저버렸다는 말이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4조 통일조항
대한민국 현행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칸트 “영구평화론”에 입각해서 이 조항을 분석해 보면, 그 정치·철학적 함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헌법의 준엄한 명령은 단순히 같은 민족이 다시 뭉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발로가 아니라 공산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북녘땅에 자유와 인권을 확장해야 한다는 자유민주적 소명 의식의 천명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명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은 “우리민족끼리”의 무조건적 단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 제도의 수렴과 보편 가치의 확립 없이는 민족의 대통합이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그 점에서 헌법이 명령하는 대한민국의 통일 정책은 공산 전체주의 불량 정권의 독재 아래서 노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북한의 인민에게 자유와 인권을 되찾아주는 적극적인 자유화, 진취적인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의 명분으로 수행했던 여러 정책 중엔 북한 인민의 고통은 외면한 채로 김씨 왕조라는 공산 전체주의 불량 정권의 존속과 강화를 돕는 편법과 꼼수가 많았다. 예컨대 정상 회담에 응하는 대가로 북한의 비밀계좌에 뒷돈을 질러주거나 탈북어민을 강제로 북송하거나 ‘대북 전단 금지법’ 따위를 입안했던 지난 정권의 몰상식한 행태는 인류 보편의 가치는 물론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서 크게 벗어난다.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헌법의 엄중한 명령을 어기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어기면서 오직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식 구호에 얽매여 감상적이고도 무원칙적 통일 정책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 정답은 바로 임종석 등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비뚤어진 역사의식과 잘못된 가치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들이 소위 진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대북 정책을 쥐락펴락했던 막강한 권력의 자칭 “통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통찰대로 범인류적 보편 가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존중하는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다. 반면 장구한 세월 한 나라를 이루고 살아왔던 같은 민족일지라도 범인류적 보편 가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선양하는 대한민국과 그러한 가치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북한은 영구적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생각하며 김정은과 더불어 “반통일 2국가”를 부르짖는 그들의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 “바보야, 문제는 북한 인민의 해방이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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