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에서 아우내까지…고문 속 마지막 "대한 독립 만세"[뉴스속오늘]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석방을 이틀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가 사망했다.
사인은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으로 인한 '갑상선 기능저하증'으로 추정된다.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자신들의 만행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거부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화학당의 교장 월터가 '일제의 만행을 세계 신문에 알리겠다'라고 항의하자 꼬리를 내렸다.
일제는 자국에 대한 국제 여론 악화를 경계했다. 1919년 4월 15일에 자행한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져 곤욕을 겪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을 것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 등 조건으로 시신을 인도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천안은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집중적으로 전파하던 지역으로, 그의 집안은 일찍이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데 이어 2년 후엔 고종 황제를 강제로 내쫓았다. 1910년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나라가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사회개혁과 부녀자 계몽에도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유관순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유관순의 삶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선교사 샤프의 추천으로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로 편입할 수 있게 된 것.
이화학당은 1886년 서울 정동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선진적인 체계와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명문 학교였다.
유관순에게 서울 상경은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다.
학업에 열중하던 1919년의 어느 날. 그는 소문을 통해 고종황제의 장례식 이틀 전에 만세 시위 운동이 열린다는 '3.1운동 추진 계획'을 전해 듣게 된다.
소문대로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며 역사적인 만세 시위 운동이 막을 올렸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자 분위기는 고조됐다.
시위대가 탑골공원을 나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과 그의 친구들은 대열에 동참해 "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대의 함성과 분위기를 직접 본 유관순의 마음엔 조국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이 싹텄다.
나흘 뒤인 3월 5일. 남대문 역 인근에서 만세 시위가 열리자 유관순은 이번에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무사히 석방됐다.
조선총독부의 고민은 깊어졌다. 시위 규모가 점점 커지며 통제가 어려워져서다. 결국, 그해 3월 10일 전국에 임시휴교령을 내리는 초강수를 뒀다. △학생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고 있고 △학교가 시위 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못다 한 시위 운동을 천안에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귀향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자신이 서울에서 본 독립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했고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지역 어른들을 설득하는 노력 끝에 대규모 만세 운동을 4월1일 천안 아우내 시장에서 전개하기로 결정됐다.
유관순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은 양력 4월1일로, 음력으로 따지면 3월1일이었다. 그리고 3.1 운동은 양력 3월1일 하루에 발생한 만세 운동이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월1일부터 4월 말까지 두 달 간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한 모든 만세 운동을 포함한다. 그가 3.1 운동의 핵심 인물로 주목받는 이유다.
마침내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 아우내 시장에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다. 시위는 한 사람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막을 올렸다. 장터는 순식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온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시위 대열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한창이던 오후쯤. 현장에 출동한 일본 헌병이 평화롭게 시위하던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도망가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해 총과 칼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이날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유관순의 부모 및 19명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일본 헌병들이 있던 주재소로 달려들어 항의하다 독립운동 주모자로 체포돼 공주 교도소로 넘겨졌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자 항소했다. 그해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선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내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것이 왜 죄가 되느냐?"며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내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있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뒤 이듬해인 1920년. 유관순은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3000여명이 크게 호응해 만세 소리가 밖으로 퍼져나갔고, 이에 교도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운행이 마비됐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지하 독방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숨졌다. 석방 이틀을 남긴 시점이었다.
영친왕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량은 1년 6개월로 감형되었고, 체포 당시 구금된 3개월도 형기에 포함됐다. 따라서 원래 일정대로라면 1920년 9월 30일에 석방될 예정이었다.
유관순의 묘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마련됐다. 하지만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자 그의 주검은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됐다. 이 과정에서 열사의 시신은 소실됐다.
현재 이태원엔 유관순 열사가 안장됐던 묘지 터에 부군당 역사공원과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조성돼 있다.
소녀가 열망하던 조국 독립의 꿈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난 1945년에 이뤄졌다.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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