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같던 남편에 유부녀 애인이 있었습니다”···유명 동화작가의 반전[사색(史色)]
[사색-80] 걷고 또 걸어도 보이는 건 모래뿐. 인간의 흔적을 발견할 거라는 희망을 갖고 걸어간 것도 며칠째. 사람은 커녕 조그만 미물의 기운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막에 불시착한 사내는 이제 조용히 죽음에 대해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 사랑하는 부인,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뇝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지 못했습니다. 흰옷을 길게 입은 남정네들이 그를 간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원주민 베두인이었습니다. 그가 평소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래서 믿지 못했던 존재들. 대자연의 힘 앞에서 그를 구원한 건 서구 문명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모래에 순응하면서 살던 ‘야만인’들이었습니다.
프랑스 비행 조종사에서 소설가로, 다시 비행조종사로 죽은 앙투안 생텍쥐페리의 이야기입니다. 인류가 가장 사랑한 동화, 그러나 동화같지 않았던 그의 인생. 오늘도 다시 사색의 시간입니다.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1900년 태어난 앙투안은 남부러운 것이 없는 아이였지요. 자상한 아버지와 어머니, 네명의 우애 좋은 형제들. 그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했습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덮치기 전까지는요.
생텍쥐페리는 이제 ‘빈곤한 가문’이었습니다. 명랑한 앙투안의 마음 한구석에는 우울로 가득한 공터가 생겼습니다. 그가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자주 도망치던 곳이었습니다. 앙투안은 자주 사색에 잠겼고, 더 자주 공상에 빠집니다.
앙투안은 내면의 아픔을 글쓰기와 그림으로 풀어냈습니다. 학교와 동네 어른들은 “그림 따윈 그만두고 산수와 문법을 공부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어머니 마리만큼은 앙투안의 심정을 잘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너를 응원할 것이라고 따스한 위로를 건네줬지요. 남자의 보호는 없었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풍파로부터 그를 감싸주는 방패였습니다.
1912년, 앙투안이 여름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창공을 가르는 한 물체를 바라봅니다. ‘비행기’였습니다. 하늘로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앙투안은 먼 거리의 비행장을 매일같이 찾아갑니다. 비행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냈지요. 하늘을 날 때의 느낌, 비행사가 되려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머니 마리는 앙투안의 ‘열정’을 눈치챕니다. 앙투안이 그 해 비행기에 처음으로 몸을 실을 수 있었던 이유였지요. 어찌나 감동을 주는 비행이었는지. 그의 문장에 그때의 느낌이 진하게 전해집니다.
저녁 미풍에 날개들이 잔잔히 흔들거리고 엔진의 노랫소리가 영혼을 달래주는데 희미한 햇살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고 있었다.
앙투안이 어머니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비행기 엔진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요. 얼마나 감미로운 음악인지 몰라요.” 어머니 마리가 없었다면, 비행조종사로서 앙투안도, 작가로서 앙투안도 없었을 테지요.
앙투안의 꿈은 현실이 됐습니다. 1926년 라코테레 그룹(에어프랑스 전신)의 조종사로 일하면서였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우편을 배달하는 조종사. 유럽부터, 아프리카를 거쳐 신대륙까지 넘나드는. 앙투안이 어렸을 때부터 꿈 꾸던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풍경이 주는 명민한 감각 때문인지, 그는 그해 첫 소설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합니다. 앙투안의 소설은 비행기 조종간으로 쓰인 셈이었습니다.
이미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예술가 콘수엘로였습니다. 그녀는 스타 생텍쥐페리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그를 단숨에 사로잡았지요. 생텍쥐페리는 그녀를 ‘독사의 혀’를 가진 여자라고 평했지만, 어느샌가 그녀에게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당당하고 강인한 여성상에게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두 사람은 곧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어린왕자는 장미를 사랑하지만, 둘은 삐걱거리다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앙투안과 콘수엘로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거친 성격의 콘수엘로와 자유분방한 앙투안은 자주 마찰을 빚었지요. 가까이 있으면 싸우고 떨어지면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의 연속. 세계를 유랑한 앙투안은 부인 콘수엘로를 두고서도 수 없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아름다운 귀족이자 사교계 명사였던 넬리 드 보기와는 오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넬리와 앙투안 모두 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에 개의치 않고 만남을 이어갔지요. 앙투안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겼습니다.
앙투안 역시 콘수엘로를 마음 깊이 사랑했습니다. 육체적 방종과는 별개로 그에게 뮤즈는 콘수엘로뿐이었지요. “맑은 샘물이 그립듯 마음속 깊이 당신이 그리워. 당신의 이면에는 고요하게 빛나는 작은 불빛이 있지.”(앙투안이 콘수엘로에게 쓴 편지)
1935년 12월 29일 앙투안이 실종됩니다. 항공 경주에 참가했다가 아프리카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면서입니다. 그와 동료 정비사 앙드레는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커피 한 잔, 화이트 와인 한 병, 포도 한 송이, 오렌지가 전부였습니다. 뜨거운 태양으로 타들어 가는 목을 축이고자 이마저도 그날 다 먹어버렸지요.
심각한 탈수 증상으로 환각을 본 것이었습니다. 넷째 날 쓰러진 그들을 사막의 베두인들이 발견합니다. 기적적인 생환이었습니다. 베두인들은 두 사람을 먹이고 카이로까지 안내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당신, 리비아의 베두인, 당신은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어린왕자’가 사막에 발이 묶인 조종사로 시작하는 배경이었습니다. 한 남자의 죽음에 직면한 경험이 위대한 문학으로 남은 셈.
1940년 프랑스가 격랑에 휘말립니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조종사인 앙투안은 공군에 자진 입대합니다. 항공정찰단에서 적군의 동태를 정찰하는 역할. 이듬해에는 독일 탱크가 프랑스 공군기를 향해 사격을 퍼붓는 와중에 무사히 귀환에 성공합니다. 그는 임무 성공으로 훈장을 받습니다.
그의 항전 의지는 굳건했지만, 조국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히틀러의 침공에 무력하게 무릎 꿇었기 때문입니다. ‘비시 정부’의 출범이었습니다. 친독 정권은 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정부 요직에 임명합니다.
앙투안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호소합니다. “친구들의 고통에 철저히 동참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단 한 마디조차 쓸 권리를 누리지 못하리라. (···)우리는 전투 중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이들의 모든 아들을 위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앙투안이라는 한 사내 덕분에 우리 어른들도 위로받을만한 동화를 하나 갖게 됐습니다. 그의 책에는 그야말로 곱씹을만한 명언으로 가득합니다.
올해로 앙투안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별로 돌아간 지 여든 해가 됩니다. 모든 것이 익어가는 이 가을, ‘어린왕자’를 읽어보시면 어떠실지. 잊고 있던 우리 어린 시절, 그 아이가 당신을 위로해줄지도 모릅니다.
ㅇ‘어린왕자’ 작가 생텍쥐페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비행을 동경해 왔다.
ㅇ어머니의 지원 덕분에 비행 조종사가 된 뒤, 이에 영감을 받고 많은 작품을 썼다.
ㅇ사막에서 불시착의 경험은 ‘어린왕자’의 원천이 됐다.
ㅇ아내를 두고서도 많은 바람을 피웠지만, 나치와 싸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비행기 조종간을 놓지 않은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ㅇ길해옥,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행동으로서의 글쓰기, 프랑스어문교육 제63집, 2018년.
ㅇ김시몽, 어린왕자의 재해석, 한국프랑스학논집 제72집,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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