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독살미인’ 김정필은 정말 남편을 죽였을까
“스무살에 과부된 것도 원통한데, 나를 사람 죽였다고? 새파란 하늘이 무서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고명한 판관께서 죄없다 말 한마디만 하시면 이자리에서 죽어도 원통치 아니하겠습니다.”(‘법정에서 구타노호’, 조선일보 1924년10월11일)
남편 독살범으로 지목된 스무살 김정필이 법정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1924년 10월10일 아침 서소문 경성복심법원 재판이 벌어지던 참이었다. 남편 김호철이 죽기 직전 진찰한 의사 최승하는 재판장이 “김호철이 살아있을 때 독약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던가”라고 묻자 “아내가 주는 약 3개중 2개를 먹고 한 개는 울 뒤에 파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의사 증언이 끝나자마자 김정필이 일어나 항변한 것이다.
◇3.1운동 지도자 공판만큼 인파몰려
‘남편 독살범’ 김정필 재판은 100년 전 경성을 몇 달간 뜨겁게 달군 스캔들이었다. 이날 서소문 재판장 주변에 2000명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방청쇄도 눈코 못뜬 경찰’, 동아일보 1924년10월11일) 3.1운동 지도자 공판때만큼 인파가 모였다고 할 정도였다.(‘법정내외에 인파’, 매일신보 1924년10월11일) 이날은 함경북도 명천군에 사는 김정필의 항소심이 열린 날이었다. 김정필은 결혼 한 달도 안돼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이미 1심이 열린 청진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는 경찰 고문으로 허위 자백한 것이라며 이날도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빈발하는 남편 살해 보도
이 재판에 관심이 몰린 이유는 1심 때 독살을 자백한 김정필이 “남편을 결코 죽이지 않았다”고 항소하면서 동시에 그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다. ‘사형미인의 언도는 연기’ ‘법정에 립(立)한 절세미인’ 등 신문마다 호기심 자극하는 제목아래 기사를 쏟아냈다. 1920년대~30년대 신문에는 ‘본부(本夫, 남편)살해’기사가 이례적으로 자주 실렸다. ‘本夫를 참살한 姦夫婦, 사형과 무기징역을 불복하고 공소’(조선일보 1921년3월3일) ‘30년학대로 本夫살해’(동아일보 1922년7월8일) ‘본부살해한 불의남녀 사형’(중앙일보 1932년12월3일)…. 이 때문에 일본 관료, 학자들이 남편 살해를 ‘조선 특유의 범죄’로 규정하고 연구할 정도였다. 조혼(早婚) 관습, 가부장제 폐해 등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낙후성을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비평’ 최근호에 ‘그녀를 살인범으로 몰았던 것은 가족내의 타자에 대한 증오였고, 성폭행당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혐오’였다면서 ‘김정필은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100년 전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김정필은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었을까, 아니면 무고를 뒤집어쓴 희생양이었을까.
김정필은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의 농부 김경렬의 다섯 자녀 중 맏딸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맏딸인 그는 학교 근처도 못가본 채 집안일과 농사에 동원됐을 것이다. 김정필이 당시로선 늦은 스무살에 결혼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먼 친척 오빠 김옥산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군이지만 왕래가 어려운 남쪽끝 하가면 지명동의 열일곱 소년 김호철과 1924년 4월27일 결혼했다. 사돈 집이 재산가였기 때문이다. 김정필은 혼사전에 남편을 본 적도 없기에, 그의 뜻이 반영된 결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남편이 병은 있지만 모양이나 사람은 괜찮소” “내 남편이 살아있으면 나를 발명(發明, 무죄를 밝혀주다)해줄 것이오”(동아일보 1924년9월8일)라고 말한 걸 보면, 부부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호철은 성병(임질로 보인다)을 앓고 있었다.
◇사건의 재구성
문제는 결혼 직후 남편의 병세가 더 위중해진 것이다. 새 며느리를 대하는 시집 식구들의 태도가 싸늘해졌을 것은 헤아릴 수있다. 김정필은 하필 이 때 시가 친척에게 ‘랏도링’이란 쥐약을 시장에서 사달라고 부탁했다. 쥐가 들끓는 친정의 식구들을 위해서였다. 시가 식구들이 보는 가운데 장롱틈에 끼워뒀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5월 23일 남편 김호철이 이 약을 먹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빈사 상태에 빠지자 시가에서 26일쯤 경찰에 신고해, 김정필이 체포됐다. 그날 주재소 부탁으로 왕진 온 의사 최승하는 환자의 피부가 누렇게 변하고, 입에서 악취가 나면서 토사물과 대변에서 마늘 냄새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황린 중독이었다. 이튿날인 27일 김호철은 사망했다. 시신을 부검한 최승하는 황린 중독 사망으로 진단했다. 쥐약 ‘랏도링’의 주성분이 황린이었다. 경찰과 검찰은 의사와 시집 식구들의 증언,남은 쥐약과 김정필의 자백을 근거로 그를 남편살해범으로 단정했다.
그런데 결혼 한달도 안된 새색시가 독약까지 먹여가며 남편을 죽일 이유가 있을까. 김호철은 쥐약을 두 알 삼켰다고 하는데, 황린 때문에 냄새가 강하게 나는 이 약을 새신부가 권한다고 의심없이 그냥 먹을 수있을까. 이기훈 교수는 김호철이 스스로 약을 먹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비방’(祕方)이라며 독한 약을 먹으면 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내가 사둔 쥐약을 먹었다는 것이다. 김호철이 경찰에게 끌려가는 아내에겐 “내 살아나기만 하면 임자는 자연 무사할 것이니 놀래지 말고 잠깐 가 있으라”고 얘기하고 의사에겐 “아내가 쥐약을 먹였다”고 얘기한 건, 황린 중독에 따른 환각과 망상 때문이라고 본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김정필의 그후
복심재판관도 김정필에게 사형을 선고하기엔 미심쩍은 대목이 있었던 모양이다. 1924년 10월22일 경성복심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정필은 “상고하겠다”며 통곡하며 끌려나갔다. 하지만 승산이 없다고 봤기 때문인지 상고를 포기했다. 모범수로 착실히 수감생활을 하다 두차례 감형끝에 12년만인 1935년 출옥했다.하지만 남편 살해범으로 복역한 그는 친정으로도 돌아갈 수없었다. 고향 명천의 읍내 일본인여관에서 하녀노릇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 없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김정필의 남편 살해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지금의 사법제도 아래서라면 김정필이 이런 부실한 증거와 증언만으로 유죄선고를 받을 것 같지않다. ‘남편살해(미수 포함)’를 양산한 100년 전과 지금은 확실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이기훈, 그녀는 정말 남편을 죽였는가?-한 살부사건의 재구성, 역사비평148호, 2024 가을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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