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안에서 빨갛게 출렁거리는 시간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페로니
귀는 얇은 편이 아닌데 글에 현혹되는 편이다. 좋은 문장에는 당연히 그렇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꽂히기도 한다. 최근에는 얼마 전에 나온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라는 부제가 붙은 ‘조금 미친 사람들’을 읽다가 그랬다. “모든 나라는 고유한 혀, 그리고 실로 고유한 미각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의 혀를 알아보라.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셔봐라 (…) 그러므로 따뜻하고 울림 있는 와인들이여, 나그네에게 당신의 곡조를 들려주세요.” 아, 당장 어디론가 떠나 ‘곡조’에 귀 기울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내게 곡조를 들려주었던 여행지의 와인을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떠오른 것은 와인이 아니라 맥주였다. 이탈리아에서 내내 마셨던 이탈리아의 맥주 페로니.
볼로냐에서였다. 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한 달을 머물 때였다. 볼로냐에는 5일 정도 있었다. 파도바, 루카, 파르마, 카라라, 산마리노 같은 마음에 담아둔 곳이 있었지만 한 달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사방팔방으로 찍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로마에서 시작해 밀라노에서 끝내는 간결한 일정을 짰다. 로마, 아시시, 피렌체, 볼로냐, 토리노, 밀라노, 이렇게 여섯 곳에서 지냈다. 피렌체에서는 토스카나 와인을, 토리노에서는 피에몬테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내내 그 동네의 와인에 젖어 지냈는데 이상하게도 볼로냐에서는 페로니를 마셨던 것이다.
와인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페로니를 더 마셨다. 물론 실제와 다르게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와인을 더 마셨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페로니에 대한 기억이 압도적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마셨고, 모두 같은 식당에서였다. 모두 야외에서였다. 포르티코(portico)라고 하는 끝없이 이어질 듯 연결된 회랑이 그 식당의 야외였다. 그 식당은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곳으로 우연히 갔다가 매일 가게 되었다. 굳이 다른 식당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엄청난 충만함을 그 식당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식의 도시로 유명한 볼로냐에서 내내 거기만 갔다.
사람들이 페로니를 마시고 있었다. 페로니 전용 잔에 사람들이 페로니를 마시는 광경은 따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건 좀 설명이 필요한데, 볼로냐의 포르티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볼로냐는 포르티코의 도시라고도 불릴 만큼 볼로냐 구시가지는 거의 포르티코로 연결되어 있다. 견고한 기둥이 떠받치는 우아한 차양이라고 할 수 있을 포르티코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해서 볼로냐에서는 비가 와도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다. 채도가 낮은 암갈색에 크림슨이 몇 방울 섞인 ‘볼로냐 로소(Bologna rosso)’라고 부르는 색으로 볼로냐 시가지는 통일되어 있는데, 포르티코는 그와 유사하거나 어울리는 색으로 이어진다. 볼로냐 로소에서 뻗어 나온 포르티코가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빨간 라벨이 인쇄된 페로니 전용 잔은 참으로 위력적이었다. 사람들이 잔을 들어 올릴 때 페로니 잔의 빨간 라벨이 움직이는 걸 보면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잔에 얼마나 집착했느냐면… 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식당의 매니저에게 페로니 잔을 사고 싶다고 했다. 매니저는 쓰던 것밖에 없어서 팔 수가 없다고 했고,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끝내지 않는 내게 매니저는 결국 페로니 잔을 줬다. 나보다 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해서 받은 페로니 전용 잔은 지금 나의 집에 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페로니는 전용 잔과 재떨이, 테이블, 의자 같은 판촉물을 만들어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결국 이탈리아 맥주 시장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고. 와인을 주로 마시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맥주를, 맥주 중에서도 ‘페로니’를 마시게 한 게 결국은 이 전용 잔의 매력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정작 가져와서는 몇 번 사용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꺼내 보니 포르티코 아래에서의 시간이 잔 안에서 빨갛게 출렁거린다. 매니저를 곤혹스럽게 만든 게 후회되지 않는 근사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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