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의 티켓 전쟁… 요즘 암표상, ‘더블’ 받고 예매 대행한다
지난 24일 오전 10시 정각, 한 공연 사이트에서 가수 나훈아씨의 11월 16일 경남 진주 콘서트 예매가 개시됐다. 5200여석 좌석이 매진되는 데 걸린 시간은 3분. 본지 기자가 좌석을 선택하고 예매 버튼을 눌렀지만 ‘접속 대기 중’이라는 문구와 함께 수천명 대기자가 있다는 상태창만 나올 뿐이었다. 2분쯤 대기하자 ‘다른 고객님이 선택한 좌석입니다. 다른 좌석을 선택해주세요’라는 메시지가 나왔고, 곧 전석 매진됐다. 불과 수 시간 뒤 각종 중고 거래 사이트에 콘서트 매물이 쏟아졌다. 정가 16만5000원짜리 표가 40만원 넘는 가격에 나와 있었다. 지난 21~22일 열린 아이유 콘서트 티켓도 정가 12만원짜리 표가 25만원에 거래됐다.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공연 암표 신고 건수는 2020년 359건에서 2022년 4224건으로 2년 새 11.8배로 증가했다. 프로스포츠 암표 신고 건수는 지난 8월 기준 5만1405건으로 2019년 6237건의 8.2배로 늘었다. 지난 20일 기아 타이거즈 경기 표 예매 사이트에선 이번 시즌 마지막 홈경기인 25일 경기까지 매진이었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는 1만4000원인 평일 일반석 티켓이 4만원, 4만5000원인 챔피언석은 12만원에 나와 있었다. KTX 등 열차 암표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추석 연휴 때도 서울~부산 편도 KTX 표(정가 5만9800원)를 10만원 넘는 가격에 판매한다는 중고 거래 판매자들이 무더기로 나타났다.
공연·스포츠·교통수단 등을 가리지 않고 암표가 기승을 부린다. 암표상들은 티켓 예약 과정에서 명령을 자동으로 반복 입력하는 프로그램인 ‘매크로’로 티켓을 대량 확보한 뒤 웃돈을 얻어 암표를 파는 것으로 알려졌다. 좌석 선택, 보안 문자 입력, 결제 정보 입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소화하려면 일반인은 몇 분이 걸리지만 전문 업체들은 단 몇 초 만에 예약을 완료한다. 일각에선 아예 ‘티켓 대리 구매’를 내걸고 영업까지 하는 실정이다. 사실상 ‘변종 암표상’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 기자들이 27일 한 티켓 대리 구매 업체 사이트에 접속했다. ‘최고의 예매 전문가들이 당신의 성공적인 예약을 책임진다’는 문구가 보였다. 나훈아씨 등 트로트 가수 콘서트부터, NCT 등 K팝 아이돌 콘서트, 외국 가수의 내한 공연까지 모두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 업체에 나훈아 콘서트 대리 예매를 문의해봤다. “표 원가를 제외하고 1장당 R석은 15만원, S석은 10만원”이라고 했다. 사실상 티켓 가격만큼의 구매 대행 수수료를 요구하는 셈이었다.
업체는 “1열 중앙부터 뒷열 사이드 순으로 예매를 시도한다”며 “예약에 실패할 경우에는 전액 환불을 보장한다”고 했다. ‘예약에 매크로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에는 “영업 기밀이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불법 아니냐’는 질문에는 “콘서트 예매로 인해 지금까지 어떠한 사고나 문제는 일어난 적이 없다”며 “안심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 가수 팬은 “100% 성공률이라니 그 정도 값을 치러도 만족한다”며 “티켓 예매 전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속 시원하게 돈을 주는 편이 낫다”고 했다.
현행 공연법·국민체육진흥법을 보면 매크로를 이용해 구매한 암표를 판매하는 행위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정부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상향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매크로 사용 자체는 불법이 아니고, 암표 판매 행위 자체를 입증하기도 만만치 않다. 주요 티켓 판매 사이트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YES24는 “매크로 프로그램 이용 여부는 현존 기술로 확인하기 쉽지 않다”고, 인터파크는 “안면 인식이나 지문 등 생체 인식 정보를 활용해야 매크로 사용을 간신히 근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티켓 구매 대행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리 업체도 수년 새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문화 공연·스포츠 경기가 인기를 끌며 암표 판매를 목적으로 한 매크로 예매, 구매 대행 비중이 늘어나면서 개인이 정상적인 경로로 예매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라며 “티켓 가격만큼의 구매 대행 수수료 지불이 일상화한다면 시장 자체가 망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朝鮮칼럼] 이 대표의 민주주의 對 재판부의 민주주의
- [태평로] 6개월 되도록 연금 논의기구도 못 만든 국회
- [데스크에서] 한국은 ‘트럼프 취약국’ 아니다
- [김윤덕이 만난 사람] 끝나지 않은 ‘정율성 공원’… 민주화 聖地가 왜 6·25 전범 추앙하나
- 페이커로 본 리더의 자격 [여기 힙해]
-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CQD와 SOS… 타이태닉 침몰엔 과학이 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
- [조용헌 살롱] [1470] 일론 머스크의 神氣
-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37] 패자의 승복
-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45] 가을
- [기고] 자녀 많으면 배우자 상속세 늘어나는 불합리 바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