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도자기·서예·그림…“500살 살고 있다”는 선승

서정민 2024. 9. 2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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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40년 화업
안료와 옻나무 수액을 섞은 물감을 옻칠 판에 흩뿌려 작업한 추상 옻칠화. [사진 예술의전당]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죠. 평상의 마음이 도죠. 이 작품들은 나의 평상심으로 작업한 결과물입니다. 물 흐르듯이 흐르고, 바람 불 듯이 걸어간 삶의 자취들이죠. 작업하는 과정은 늘 즐거웠습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시도이고, 무에서 유가 나오는 이치의 장이었죠. 운문 선사의 말처럼 나에게 일상은 ‘날마다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빚고, 옻칠을 하고, 천을 염색하는 그 모든 과정이 내게는 날마다 좋은 날이었죠.”

9월 28일부터 11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에서 조계종 종정 성파(85) 스님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개인전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코스모스’가 열린다. 선예란 불교에서 선(禪) 수행의 하나로 행해지는 예술 작업을 뜻한다.

성파 스님은 대한민국 조계종의 큰 어른으로 1960년 불교에 입문해 1981년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고 2022년 제15대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했다. 동시에 그는 긴 세월 불교미술, 서예, 한국화, 도자, 염색, 조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해 온 예술가다. 이번 단독 개인전은 1980년대 선보였던 금니사경과 더불어 최신작까지 40여 년간 작업한 화업 12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예술의전당 수석 큐레이터로 은퇴하기 전인 5년 전부터 이 전시를 기획했다는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40여 년이라는 긴 세월과 수천 점에 이르는 막대한 작품을 되짚어보는 기획은 성파 작가가 과거부터 최신작까지 어떤 층위를 거쳐 왔는지 살펴보고 그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1985년 작업한 금니사경. 금박을 아교에 개어 만든 안료로 먹지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옮겼다. [사진 예술의전당]
전통 한지를 만들고, 옻칠을 하고, 도자기를 빚고, 서예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성파 스님은 스스로 “나는 500살을 살고 있다” 할 만큼 여남은 사람이 평생 할 일을 혼자 해내고 있다. 그런데 최신작을 보니 그 여러 갈래 길이 ‘옻칠’이라는 소재의 물성을 통찰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파 스님은 내구성·방수성·방부성·절연성이 뛰어난 옻칠의 성질을 회화·도자·섬유·조각 등에 접목해 독자적인 옻 예술 장르를 만들어냈다. 태초, 유동, 꿈, 조물, 궤적, 물속의 달 등 6개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걸어온 ‘선예의 길’이 어떤 방향성을 지향했는지, 지금 새롭게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딘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전시의 시작인 ‘태초(太初)’ 섹션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안에 검은 기둥 수십 개가 서 있다. 우주의 시작을 상징하는 암흑물질과 태초의 에너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직물인 삼베에 수십, 수백 번 옻칠을 해서 단단한 형태로 거듭난 검은 기둥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는 상징적 오브제로, 그 사이를 걷고 있으면 우주를 산보하는 느낌이다.

조계종의 큰 어른이자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인 성파 스님. [사진 예술의전당]
‘유동(流動)’ 섹션에선 최신작을 감상할 수 있다. 한지와 나무판을 색색의 옻칠로 채운 작품들은 서양의 마블링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데 성파 스님은 “자연과 바람과 물이 그린 그림”이라고 소개했다. 옻나무 수액에 안료를 섞어 색을 만들고 한지 위에 뿌린 후 붓이나 손 같은 도구 없이 다음 과정을 자연에 맡겼기 때문이다. 색색의 물과 바람이 섞이고 노닐다 흩어지면서 결과 리듬을 만들고, 에너지와 기운을 담아낸 그림이다. 전통 한지에 전통 소재인 옻칠을 사용했지만 그 결과물의 장르는 서양의 추상화 같다. “금 한 덩어리를 녹이면 반지·안경·수저 등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죠. 이걸 다시 한 데 녹이면 새로운 금 한 덩어리가 되듯, 여러 나라의 미술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서 우리 전통문화와 섞으면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국 미술의 한류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꿈(夢)’ 섹션에선 추상과 구상이 혼합된 인간, 동물, 기하학적 형태들이 혼재하는 초현실 세계가 펼쳐진다. 성파 스님을 닮은 듯한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이 있는가 하면, 그림 같은 문자도 보인다. ‘조물(造物)’ 전시실에선 도자와 옻칠이 결합된 칠예 도자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도자의 기본은 먼지처럼 미세한 흙, 즉 미분인데 이걸 한 덩어리로 만들기 위해 물을 섞으면 비로소 흙과 물이 결합돼 하나의 형태를 이루죠. 이걸 한 번만 구우면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갈 테지만 두 번 구우면 깨져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적분이 되죠. 도자를 통해 중생이 수행하고 깨쳐 부처가 되는 길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궤적(軌跡)’ 전시실에선 유교의 시서화를 시작으로 불교의 금니사경과 도자, 그리고 추상적인 옻칠 예술로 확장되는 성파의 예술적 여정을 탐구한다. ‘물속의 달’ 전시실에선 통도사 서운암 연못에 되살린 ‘울산 반구대 암각화’처럼 옻칠의 방수성을 응용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실제로 옻칠로 꾸며진 전시 작품들이 물속에 떠 있다.

“말로 하는 대화도 있고, 문자로 하는 대화도 있지만 그림·예술은 세계 공통어죠. 말이 달라도 독화(그림을 읽다) 할 줄 알면 다 통하게 돼 있어요. 내가 옛 선현들과 대화를 나눴던 것처럼, 후대들도 이 작품들을 통해 나와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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