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은의 고전노트] 호라티우스의 詩에서 나온 말 “카르페 디엠”

이수은, 독서가·’느낌과 알아차림’ 저자 2024. 9. 2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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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 디엠

기원전 65년 이탈리아 베노사에서 태어난 호라티우스는 로마인에게 정복된 삼니움족의 후손이었다. 노예였음에도 능력이 출중했던 그의 부친은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유민이 되는 데 성공하자, 자식 교육을 위해 로마로 이주했다. 10대 후반, 아버지를 여읜 호라티우스는 홀로 아테네로 갔다. 비록 로마의 속주였지만, 학문에 관한 한 그리스는 여전히 당대 최고였다. 그는 열아홉 살에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 2년간 철학을 공부했다.

기원전 44년, 브루투스는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꼈던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아테네로 피신한다. 로마사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지도자 중 한 명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전제군주를 예견한 브루투스는 공화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브루투스가 한 명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사극 ‘줄리어스 시저’에 잘 재현되어 있다. “내가 카이사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의 야심을 죽였다.”

아테네에서 연설하는 브루투스를 보고 피가 뜨거워진 청년 호라티우스는 공화군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다. 기원전 42년 카이사르의 양자(養子) 옥타비아누스가 필리피에서 복수전을 펼칠 때, 호라티우스는 브루투스의 장교로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패한 브루투스는 자살했고, 호라티우스는 사면받는 대신 재산을 몰수당한다. 그는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 시를 짓기 시작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반대 세력을 척결하고 마침내 ‘아우구스투스(존엄자)’가 된 초대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현군(賢君)답게 반대자들을 포용했다. 호라티우스가 서양 문학사상 최초의 서정시인으로 평가될 작품들을 창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호라티우스의 ‘서정시’ 1권 11편은 8행에 불과하지만, 모든 행이 필사(必死)의 인간을 위한 진언(眞言)이다. “짧은 우리네 인생에/긴 욕심일랑 잘라내라. 말하는 새에도 우리를 시새운/세월은 흘러갔다.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 유명한 경구들은 대개 그 유래는 잊힌 채, 보편적 지혜로 공유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쓰라린 삶이 ‘카르페 디엠’이란 시구를 가르쳤던가 생각한다면, 헛되이 보내기엔 너무나 소중한 하루하루다.

이수은 독서가·'평균의 마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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