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强달러가 국익” 클린턴의 이 정책이 트럼프 키웠다
달러 전쟁
살레하 모신 지음|서정아 옮김|위즈덤하우스|360쪽|2만1000원
“중국이 하는 짓을 보세요. 일본이 수년간 해온 짓을 보세요. 환율 평가 절하로 장난칩니다. 우리는 바보처럼 보고만 있습니다.”
2017년 1월 말, 당시 취임 9일 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입에 글로벌 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이 말의 배경엔 중국, 일본 등이 일부러 자국 통화는 약세, 달러는 강세로 만들어 미국 제조업을 망가뜨렸는데, 되돌리려면 ‘약(弱)달러’가 좋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1990년대 이후 20년 넘게 미국이 명시적으로 표방한 ‘강(强)달러’ 정책을 서랍 깊숙이 넣겠다는 말로 들렸다.
워낙 변덕이 심한 트럼프의 말이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마저 “달러 약세가 미국에 좋다”라고 했다. 재무장관으로 ‘달러 수호자’ 역할을 맡은 므누신은 트럼프 비위를 맞추면서도, “대통령은 시장 개입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라고 시장을 달래는 등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 책 저자인 살레하 모신(Mohsin)은 경제 매체 블룸버그의 기자다. 2016~2022년 백악관 경제 파트와 재무부를 담당했다. 그는 역대 재무장관들이 지키려던 달러 가치의 역사를 그들을 주어로 해서 풀어 냈다.
달러는 80년 전인 1944년 미국 뉴햄프셔의 휴양지 브레턴우즈에 모인 44국 재무 관료 앞에서 금과 동급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 대가로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은 달러 가치를 금 1온스당 35달러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저자는 “이 결정으로 달러는 영어만큼이나 중요하고 우세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했다.
금값에 고정됐던 달러 가치는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하자 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재무부는 달러 가치를 통제하고 싶었다. 1985년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은 맨해튼 플라자호텔에서 일본·서독·영국·프랑스 등 4국 재무장관과 비밀리에 만나 달러 가치를 낮추는 걸 관철시켰다. ‘플라자 합의’다. 2년도 안 돼 달러 가치가 40%나 폭락하자, 1987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장관들을 다시 만나 달러 가치를 높이자고 했다.
그런데 달러 시장이 점점 커져 ‘팔 비틀기’ 개입은 안 먹히게 됐다. 현재 하루 달러 거래액은 6조6000억달러가 넘는다. 미국 외환안정기금은 400억달러쯤이다. 달러 시장에 돈 풀어 개입하는 건 비유하자면 새 떼 방향을 바꾸려고 부채를 드는 것만도 못하다.
그래서 1990년대 들어 달러 안정을 위해 말로 강달러를 선언하는 정책이 나왔다. 클린턴 정부 두 번째 재무장관이 된 로버트 루빈의 팀은 1994년 백악관에 모여 ‘강한 달러가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A strong dollar is in our national interest)’는 구호를 만들었다. 저자는 “전 세계 투자자에게 미국 경제의 힘을 믿어도 좋다고 안심시키는 포고령이었다”고 했다. 상황에 따라 달러 약세로 갈 때도 있었지만, 루빈과 후임자들은 이 말을 되풀이했다. 루빈 팀에선 래리 서머스, 티머시 가이트너 등이 뒷날 재무장관에 올랐다.
강달러로 미국에 돈이 몰려와 월가는 낮은 금리로 쉽게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환호했다. 소비자는 싸게 해외 물건을 샀다. 하지만 어두운 면도 컸다. 수출 경쟁력이 없어진 펜실베이니아·오하이오·인디애나 등 ‘러스트 벨트’ 제조업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지역 일자리는 사라졌다. 20여 년이 흘러 트럼프는 러스트 벨트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며 인기를 얻었다. 민주당 클린턴 정부에서 굳건해진 강달러 정책은 역설적으로 공화당 출신 트럼프의 ‘약달러가 좋다’는 주장이 파고들 수 있는 토양이 됐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선 여전히 ‘달러 약세가 미국 수출에 좋다’는 공화당 후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맞붙는다.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달러가 강세로 갈지, 약세로 갈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저자는 “강한 달러는 강력하고 튼튼한 경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경제는 흔들리는 진자와 같다. 한쪽으로 쏠리면 균형을 찾는 힘이 있다. 그 중심을 잡아주는 건 경제의 튼튼한 기초 체력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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