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상속의 시대가 상실의 시대를 부르지 않으려면

2024. 9. 2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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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소설가
나는 내 새끼가 진심으로 부럽다.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지인이 꺼낸 말이다. 처음에는 그 말을 실없는 농담으로 여겼는데, 이유를 들은 뒤에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본인과 배우자 각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부동산이 있고, 본인이 현재 보유 중인 부동산도 있는데, 언젠가 이 모든 부동산을 물려받을 사람은 하나 뿐인 새끼밖에 없다고. 내 새끼는 미래에 돈 때문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지인의 한탄인지 자랑인지 모를 말을 들으니 다가올 미래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출산율 하락의 바닥이 보이지 않으면서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 물려줄 사람보다 줄어들고 있다. 머지않아 소수의 미래 세대에게 부가 집중되는 상속의 시대가 열리고, 그로 인한 빈부격차가 극복하기 어려운 초격차 수준으로 벌어지겠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아찔해져 술기운이 가셨다.

「 상속 양극화로 ‘빈부 초격차 시대’
근로소득만으론 극복 불가능
상속세 인상으로 해결될 문제 아냐
징벌적 세금 아닌 대안 연구해야

상속의 시대는 이미 다가온 미래다. 국세청의 ‘상속세 및 증여세 결정현황’에 따르면 2013년 6275명이었던 상속세 과세 대상 피상속인은 2020년 1만181명으로 늘어나며 처음으로 1만 명대를 넘어섰다. 그로부터 불과 3년 뒤인 2023년에는 1만9944명으로 늘어나며 2만 명대를 코앞에 두고 있다. 상속·증여세 과세 표준과 세율은 1999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라는데, 과세 대상 피상속인만 급증했다. 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상속의 양극화에 따른 빈부 초격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방증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격차가 불러일으키는 부작용 중 하나는 무기력증이다. 변화를 위한 노력과 의지는 현재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내게도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모으면 서울에 내 집 마련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잡은 나는 월급의 70%를 적금으로 부었고, 그렇게 모은 적금을 예금으로 돌리기를 몇 년 동안 반복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목돈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은 결혼 준비 과정에서 무너졌다. 내가 모은 돈으로는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은커녕 구축 아파트 전세를 얻기에도 부족했다. 결혼 자금을 전혀 지원받을 형편이 못 됐던 나는 작은 빌라 월세방을 신혼집으로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부동산 시장이 폭등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월세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서울을 벗어나 ‘영끌’해 겨우 내 집을 마련했다. 월세보다 원리금을 감당하는 게 낫다고 자위하며 매일 새벽 첫차로 종점과 종점을 광역버스로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비슷한 시절에 결혼하고 서울에 신혼집을 얻은 직장 동기들을 바라보며 상속과 증여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와 그들의 자산 규모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벌어진 지 오래다. 근로소득만으로는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한동안 무기력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상속의 시대가 성장 동력과 활력을 잃은 의욕 상실의 시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내가 주목하는 불길한 징후는 장기 미취업 청년의 증가다. 최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청년층(15~29세) 부가 조사 마이크로데이터에 따르면, 최종 학교를 졸업했지만 3년 이상 취업하지 않은 청년은 지난 5월 기준 23만8000명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근 3년(2022~2024년) 중 가장 많은 인원이다. 이들 중 무려 34.2%(8만2000명)가 취업 준비를 하지 않거나 별다른 직업 교육을 받지 않고 그냥 집에서 쉬었다. 나는 이들의 선택이 결코 한심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근로소득이 하찮아 보이게 하는 세상을 위해선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상호확증파괴 전략으로 느껴져 섬뜩하다.

그렇다고 상속세를 큰 폭으로 인상해 소득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식의 게으른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된다.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인구 구조 변화에서 비롯되는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부의 대물림 문제로 바라보는 순간 모든 논의가 어그러진다. 이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자산 양극화 문제에 가깝다. 누군가로부터 상속세를 징벌적 수준으로 더 걷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애초에 정치권에서 상속세 인하 논의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속의 시대를 상실의 시대로 만들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머리를 맞대고 조금 더 멀리 봐야 한다. 논의는 빠를수록 좋다.

정진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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