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지어졌으나 지워진

2024. 9. 2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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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다, 지워지다’ #29 ©박외득
이름을 짓고, 집을 짓고, 옷을 짓고, 밥을 짓고…. 특별히 정성을 들이는 행위에 우리는 ‘짓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게 ‘지어진’ 것들로 또한 정성스레 삶을 지어왔다.

아버지가 지어준 사진가 박외득의 이름은 ‘외가에서 얻은’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외가인 경주의 기억을 간직한 채 부산 영도 봉래산 아랫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집 주위에 밭이 많고 산복도로여서 집 앞에서는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이름에 외가가, 탯자리가 담긴 때문일까. 자신이 나고 자란 모든 환경이 사라졌음에도, 삶을 짓던 집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집이 사라지면, 그 집에서의 기억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그녀의 사진 시리즈 ‘짓다, 지워지다’가 시작되었다.

사진기를 들고, 어린 시절 기억 속 장소와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풍경과 사물을 찾아다녔다. 외가가 있던 경주와 울산의 여러 마을들을 반복해서 다녔다. 천천히 동네를 걸으면서, 집들을 기웃거리면서, 지금의 실재에서 과거의 추억이 피어오르기를 기다렸다.

촬영은 다중촬영을 택했다. 사진 한 컷을 찍은 후 일정 간격만큼 겹쳐서 다음 컷을 찍는 방식이다. 소실점을 그리며 멀어져가는 길을 찍고 그 필름을 다시 되돌려두었다가 어느 날 우편함이 걸린 대문을 찍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장소와 시간이지만, 둘이 만나 ‘집으로 가는 길’을 이룬다.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엄지손톱만 한 토끼풀꽃이 돌담 위에 숭굴숭굴 흐드러진 불두화와 같은 크기로 피고, 방 안에 상보가 덮인 채 놓여있는 밥상과 저물녘 골목길에 켜진 가로등이 마주 본다. 안이 얼비치는 싸리발 아래 가지런히 구두가 놓인 여름날의 댓돌과 감이 매달린 초가을의 감나무가 나란하고, 기와지붕 위로 날려 올려진 신발 한 짝과 하늘을 나는 연이 대칭을 이룬다. 작가가 직접 암실에서 인화했기에(젤라틴 실버 프린트·Gelatin Silver Print) 끊기기도 이어지기도 하면서 언저리가 흐릿한 기억과 더욱 닮는다. 그리고는 고요히, ‘지어졌으나 지워진’ 그리운 것들에게로 우리를 이끈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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