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대중이 소설에 들어올 때
자크 랑시에르 지음
최의연 옮김
오월의봄
자크 랑시에르(1940~)의 한국어 번역서는 2008년 처음 나왔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어쩌면 프랑스 사상의 유행도 거의 소멸한 시점이었다.
그토록 늦은 소개가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음은 금방 드러났다. 랑시에르는 한국에서 크게 사랑받는 현대 사상가가 됐다. 감각의 분배, 몫 없는 자의 몫, 무지한 스승, 치안 같은 그의 개념은 전시회 도록에서 신문 칼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등장했다.
『픽션의 가장자리』는 프랑스에서 2017년 출간된 랑시에르의 소설론이다. 포크너, 콘래드, 울프, 포 등에 대한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픽션’은 필연적 인과연쇄에 따라 사건을 해명하려는 시도를 말하며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 모델을 따른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관한 분석도 들어 있다.
가장자리란 무슨 뜻인가? 픽션의 바깥이 있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행동이 가능한 자, 즉 지배 계급만 픽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처음부터 분명했다. 평생 똑같은 일과만 수행하는 대중은 픽션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어디에 있나? 소설가가 내다보는 창밖에 있을 것이다. 스탕달 소설에서 두 주인공이 창을 매개로 서로 완벽한 응시를 교환하는 유토피아적인 장면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빈자(貧者)의 출입이 금지된 보들레르와 모파상의 유리창이다. 그러나 대중은 결국 픽션 안으로 들어온다. 울프의 소설처럼 대중의 보잘것없는 행위가 최고의 중요성을 갖도록 아예 픽션의 규칙을 수정하면서 말이다.
19세기 중반 출현한 『자본론』과 추리소설은 서로 거울과 같은 관계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자본론』은 애써 도달한 픽션(이론적 논증) 위에 현실 고발 사례를 끝없이 덧붙이면서 좀 기묘해진 텍스트이다. 추리소설은 정확히 반대이다. 인간적 현실을 말끔히 제거한, 픽션(추리)의 재출발이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과연쇄를 명쾌하게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부 묘사로 도피하게 된 픽션의 위기가 있었다. 알다시피 루카치는 여기서 소설의 타락을 보았고, 아우어바흐는 그 극단화된 형태, 울프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리얼리즘의 최고봉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작가의 윤리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픽션에 대중을 포함시키는 건 작가의 의지에 달린 일일까? 콘래드는 ‘그건 불가능하다’는 답을 하기 위해 호출된다. 콘래드에 따르면 작가는 인물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그가 공감하는 인물(선인일 수도 악인일 수도 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는)만 데려올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정치 강령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작가가 정치를 의식하는 순간 그가 알던 인물에 대한 공감은 사라진다. 랑시에르는 이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콘래드 후기의 정치 소설들은 작가가 모르는 인물들을 데려왔고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반동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랑시에르가 “어떠한 평등의 프로그램 없이도 우애의 지평을 여는 언어”를 요구할 때, 아마 그는 문학이 우리에게 배제된 자를 떠올리게 하는 한 “좋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온건한 권유가 작품으로 구현되는 일은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통찰력 있는 문학론은 하나의 창작 지침으로 요약되는 순간 평범하고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랑시에르를 먼저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비범한 문학적 식견과 통찰을 즐기면 된다. 각 작가에 대해 그가 하는 말들을 음미한다는 마음으로 뒤적거리는 게 이 책의 가장 좋은 활용법일 것 같다. 권말의 찾아보기는 그 여행에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 틀림없다. 가장 들어가기 쉬운 입구는 2부의 ‘추리소설’과 3부의 ‘콘래드’일 것이다.
김영준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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