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 장기표 "불의엔 저항했어도 사람 미워한 적 없어"
‘영원한 재야’ 장기표의 삶…무엇을 남겼나
26일 영면(永眠)에 든 장 선생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와 가까운 3인에게 물었다.
60년 지인으로 장 선생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지킨(호상·護喪)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특히 오래 남는 생각은 장기표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독재를 타도한다든가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나 저항은 있지만, 사람을 특별히 미워하거나 그런 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 말 고교 교사로 근무하던 당시 수배 중이던 고인을 숨겨주기 위해 고2 학생의 입주 가정교사로 소개했던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하루는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와서 뜨끔했다. 어머니는 그러나 ‘중3 아이까지 돌봐주고 공부만 아니라 인간 됨됨이도 가르친다. 집안사람들에게 너무 잘한다. 자신의 방은 물론 집안 청소까지 한다. 가정교사를 많이 둬봤지만 이런 분은 처음 본다.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기표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장 선생이 1992년 민중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24세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맺은 인연을 32년 이어온 김용태 전 국민의힘 의원은 장 선생의 삶을 인격·용기·미래 세 단어로 정리했다. 그는 “참 인격자”라며 자신의 가족사를 꺼냈다. 그는 “장인은 평생 미장일을 하던 건설노동자였다. (장 선생은 장인을) 허투루 대하지 않고 ‘김 선생’이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며 “사람사람 하나에 책임을 다했는데, 장인이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갔을 때 (아내를 포함한) 3남매에게 ‘아빠가 나올 때까지 같이 살자’고 했던 분”이라고 전했다. 김 전 의원의 부인이 장 선생의 ‘수양딸’이 된 계기였다.
용기와 관련해선 이렇게 말했다.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게 민주화 운동인데 많은 이들이 운동을 할 때 가졌던 신념 체계와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장 선생은 ‘시대가 바뀌었고 중대한 오류였다. 과오를 반성하고 새로운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고 그래서 나온 게 헌법체제 내 합법적 정치운동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다들 얼렁뚱땅 민주화운동 훈장으로 공직에 나가고 정치를 하고 사회지도층으로 들어갔다. 진짜로 용기 있는 사람, 양심 있는 사람의 차이라고 본다.”
그는 미래를 두곤 “현실화할 정치적 동력을 만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10년, 20년을 내다보면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온 구체적인 성과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장 선생의 낙관주의도 언급했다. “나는 (총선에서) 두 번 떨어졌는데 지옥을 헤매고 있지 않나. 이분은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는데 언제나 낙관주의에 근거해서 끊임없이 자기 행동을 수정할 건 수정하고 다음에 더 나아갈 것 나아간다. 32년간 계속 실패했지만 장기표란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서다.
김 전 의원에게 ‘장 선생이 역사의 실패자로 기억되진 않을까’라고 했더니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장 선생은 당대에 주어진 사명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맞서서, 일을 수행해왔고 성공했든 실패했든 주어진 사명을 피한 적이 없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도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다른 전쟁터에서 싸우는데 같은 젊은이로서 나도 참전 안 할 수 없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 뻔한 정치적 성공 경로가 있고 이분에게도 숱하게 찾아왔지만 자기 신념대로 움직였다. 이런 게 참 놀라운 일이고 나로선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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