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 전답 팔아 '백산상회' 설립, 독립단체 전천후 지원

2024. 9. 28.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⑨ 백산 안희제
민족자본을 일으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구국활동에 생애를 바친 백산 안희제 선생. [사진 김석동]
‘정녕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시며, 민족언론의 선구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이신 백산 선생이 여기 잠들어 계시다’ - 경남 의령 백산 안희제 묘비문

안희제 선생은 시대적 격변기인 1885년 경남 의령의 소지주이자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산(白山), 본관은 순흥에서 분파한 탐진(현 강진)으로 7세 때부터 재실에서 한학을 배웠고 15세에 창녕의 성창영과 결혼했다. 을사늑약 후 정세불안을 우려한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해 흥화학교에서 수학했다. 1906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경제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양정의숙 경제과로 전학해 1910년 졸업했다. 양정의숙은 전문과정 폐지 후 양정고등보통학교가 된다.

선생은 양정의숙 시절부터 신교육을 통한 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 1906년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고, 1907년 의령에 소학교인 의신학교와 창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영남지역 신교육운동에 앞장섰다.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과 함께 지역 교육진흥을 위해 ‘교남교육회’를 창립하고 임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백산상회 주주와 영남일대 자산가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해 ‘기미육영회’를 설립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해외로 유학을 보냈다. 전진한, 안호상, 이극로, 신성모 등이 유학 후 독립운동 또는 각각의 전문분야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22년에는 민립대학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교육사업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채호 등과 비밀단체 ‘대동청년당’ 결성
경술국치에 앞서 1909년에는 서울에서 남형우, 서상일, 신채호, 김동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했고 제2대 단장을 맡게 된다. 대동청년단은 일제식민지 하에서 비밀결사체로 조직되어 운영됐기에 관련 자료나 기록 등이 별로 없어 구체적 조직과 활동내용 등을 알 수 없으나 무장투쟁과 합법조직을 연계하면서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0여 명의 당원들은 당대 이름난 항일운동가들로 무장투쟁, 임정수립, 의열투쟁, 교육사업, 언론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투쟁전선에 깊이 관여한 인물들이다.

경술국치 후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1911년 중국과 러시아 망명길에 나서 북간도, 연해주, 시베리아, 상해 등을 다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3년 만에 귀국한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선 지속적인 재정적 뒷받침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운동기지구축과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목적으로 집안의 전답 2000마지기를 팔아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영업이 확대되면서 1917년에는 합자회사로, 1918년에는 경주 최부자집 12대손이자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등 영남대지주들이 참여해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편하고 부산 최대의 회사가 되었다. 백산무역은 국내 18개소, 만주지역 3개소에 지점 등을 설치해 독립운동단체 활동을 전천후로 지원했다.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자 백산무역은 막대한 자금지원에 나섰고 임정이 국내외 연락·교통망으로 설치한 ‘연통제’의 핵심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백산무역이 독립운동 자금공급처와 국내외 연락망이라는 것을 파악한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으로 1928년 초 해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수차례 체포되는 등 고초를 치렀다.

선생은 일찍이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민족언론 육성을 위해 헌신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과 부산지국장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부산·대구·평양 등지의 언론사 지국들은 민족운동의 지방조직 역할을 했다. 1927년에는 월간학술잡지 자력을 발행했으며 1929년 3대 민족지 중 하나인 중외일보(최남선의 시대일보 후속지) 사장으로 취임했다. 일제탄압과 재정악화로 인한 경영난 등으로 중외일보는 해산되고 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꾸게 된다.

백산기념관 전경. 1995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부산 동광동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 건립됐다. [사진 김석동]
한편 선생은 독립운동의 저변확대라는 큰 틀에서 상공인들로 구성된 ‘부산예월회’를 조직하고, 청년단체 연합조직인 ‘부산청년회’를 설립해 간사로 활동하는 등 사회문화운동과 독립운동을 연계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 침략에 나서면서 언론투쟁 등을 본격 탄압해오자 선생은 1933년 다시 만주로 망명해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나선다. 망명 전부터 자산을 정리해 광산 부호 김태원과 함께 발해의 고도 상경용천부가 있었던 길림성 영안(닝안)에 ‘발해농장’ 건설을 위해 대규모 토지를 매입했다. 1932년 목단강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아 농지에 수로를 건설하고 광활한 땅을 개간한다. 이 땅에 국내에서 이주해 온 3백여 호의 가구를 정착시켜 자작농육성과 농지개발을 추진했고 이 모델을 만주일대에 확산시키려 했다.

이와 함께 동경성에 발해보통학교도 설립해 교육활동을 이어갔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업이민을 위한 농지개간사업이었으나 실제는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선생은 민족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에도 깊게 관여하게 된다. 1909년 홍암 나철이 단절된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를 다시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구국운동을 펼치기 위해 ‘단군교’를 창시했고 1910년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어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나철 순국 후 이어 받은 2대 교주가 김교현, 3대 교주가 석정 윤세주의 6촌 형인 윤세복이다.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한 선생은 1934년 대종교총 본사가 발해농장이 있던 동경성으로 옮겨오게 하고 본격적으로 교세확장을 위해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세력을 규합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다.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해온 바 있다. 특히, 대종교는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인식될 정도로 한민족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고 많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대종교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고 만주지역 독립운동 주도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자 일제는 중국의 만주군벌과 결탁해 본격적인 탄압에 나선다. 1942년 11월 대종교를 종교로 위장한 정치운동으로 조작하는 임오교변 사건을 일으킨다. 3세 교주 윤세복과 안희제 등 대종교 간부 21명은 만주와 국내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체포됐다. 선생은 고향 의령에서 잠시 요양하던 중 체포되어 목단강성으로 이송되었다.

이병철 회장, 선생 조언얻어 삼성상회 열어
안희제 선생이 1906년 부산 구포에 설립한 구명학교(현 구포초교) 개교식. [사진 구포동 향토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선생 등 10명은 조사과정에서 순국한다. 8개월간 모진 고문 끝에 병보석으로 출감한 바로 다음날인 1943년 9월 2일 선생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던 중 향년 59세로 순국했다. 이후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은 윤세복과 징역형을 받은 6명은 목단강성 감옥에 투옥됐다.

선생의 유해는 고향 의령에 안장됐고 대종교에서는 순국십현으로 추존했다. 1961년 의령에 백산회관(후에 백산도서관, 현 의령도서관)이 세워졌고,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73년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명예회장을 맡아 백산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의령 출신으로 선생의 집안과도 가까운 사이였던 이 회장은 만주 신경(현 창춘시)에서 선생을 만나 사업에 대한 조언을 얻어 대구에 삼성상회를 열었다고 한다.

1976년에는 의령에 선생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1995년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부산 동광동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 백산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인근 용두산 공원 입구에 흉상이 세워졌다.

선생은 백산상회는 물론, 유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조달의 중심역할을 하면서 교육구국운동, 비밀결사단체, 민족산업육성, 항일언론투쟁, 문화운동, 대종교를 통한 민족운동 등 일생을 구국활동에 헌신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