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12選의 비둘기파 … 이시바, ‘기시다 외교’ 승계할 듯
이시바 시게루(石破茂·67) 전 일본 자민당 간사장이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후임으로 27일 선출됐다. 이시바는 이날 기시다의 임기 만료 및 재선 불출마로 치러진 자민당 새 총재 선거 결선 투표에서 유효투표 총 409표 가운데 215표를 획득해 당선됐다. 그는 다음 달 1일 임시국회의 총리 지명 투표에서 일본의 102대 총리로 선출될 전망이다. 내각제 국가인 일본에선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되며 현재 제1당은 자민당이다.
이시바는 이날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선 전체 유효투표 735표(국회의원 367표, 당원·당우 368표) 가운데 154표를 얻어 선거 막판 지지세가 상승했던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181표)에게 밀리며 2위에 그쳤다. 3위는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136표)이었다. 하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차지한 후보가 없어, 1·2위만 놓고 치러진 자민당 의원 위주의 결선 투표에서 극적인 역전 승리를 만들었다.
이시바는 ‘4전 5기’ 끝에 자민당 총재에 오르게 됐다. 자민당 내 한일 관계 등에서 ‘비둘기파’(유화파)로 분류되는 이시바는 일반 국민과 당원 사이에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과거 네 차례 총재 선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NHK 등 일본 언론들은 “강경 보수 성향의 다카이치가 총재에 오르는 데 대한 당내 불안과 우려가 팽배해 이시바가 역전 승리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다음 달 출범할 이시바 내각은 기시다 내각의 한국 중시 외교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지난 8월까지 도쿄에 주재했던 윤덕민 전 주일 대사는 “이시바는 대사관저에 와서 만찬을 함께 하는 등 우리 측과 자주 접촉해 왔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만든 우호적 한일관계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투표 직전에 “다카이치는 나와 정책 방향이 다르다”며 “당원이 지지하는 인물에 투표하겠다”고 발언해 막판에 사실상 이시바의 당선을 도왔다. 구(舊) 기시다파의 소속 의원 40여 명이 결선투표에서 이시바에게 투표한 것으로 보인다.
1957년 도쿄 지요다구에서 태어난 이시바는 이듬해 부친 이시바 지로(1908~1981)가 일본 서남부 돗토리현 지사로 당선되면서 줄곧 돗토리에서 자랐다. 1979년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은행원으로 일했고, 부친이 별세한 1981년 아버지를 이어 정계에 입문했다. 1986년 중의원(일본 하원) 선거에서 당시 최연소인 29세로 당선된 이후 내리 12선을 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시절 방위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방위청이 방위성으로 승격한 2007년엔 방위상(국방부 장관격)으로 임명됐다. 이후 아소 다로, 아베 신조 등 자민당 내각에서 농림수산·지방창생담당상 등 각료를 두루 거쳤다.
강경 보수가 득세해온 자민당에서 온건한 정치 성향을 가진 편으로 평가받는다. 아베·아소·기사다 같은 대표적인 ‘정치 명문가’ 출신이 아닌 데다, 이들과 때때로 대립해 비주류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 강경 우파의 맹우(盟友)라는 아소와 아베를 줄곧 견제했으며 2009년엔 아소 당시 총리에게 직접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발(發) 경제 침체로 내각 지지율이 추락하자, 총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비판한 것이다. 아베 전 총리가 연루됐던 ‘사학(私學) 스캔들’을 두고는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안보 오타쿠(골수 마니아)’로 불리는 이시바는 일본 정계에서 손꼽히는 ‘안보통’이다. 취미 역시 전투기·군함 장난감 조립이라고 한다. 방위청 장관 시절에 러시아 국방장관과 회담을 앞두고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며 러시아 항공모함 모형을 제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시바의 지론은 ‘아시아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설이다. 아시아에도 나토와 같이 한 회원국이 공격당하면 전체 국가가 자동 대응하도록 설계된 집단방위 체제를 만들자고 그는 주장한다. 이시바는 이날 “집단 안전 보장의 핵심은 각 나라가 의무를 지는 것”이라며 “일·미 조약, 미·한 조약, 미·필리핀 조약 등이 이미 있기에 ‘쿼드’의 연장선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쿼드는 미국·일본·호주·인도 4국의 안보 협의체다. 그는 “지역의 평화를 어떻게 만들지, 일본이 주체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경제 정책은 ‘새로운 자본주의’라는 기시다의 노선을 계승할 전망이다. 그는 “20년간 경제성장률이 정체된 가운데 기시다 총리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새 정권도) 물가 인상을 넘는 임금 상승을 실현해 ‘새로운 자본주의’를 더욱 가속하겠다”고 말했다.
모리 오가이 등 일본 근현대 소설가의 작품·만화 할 것 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애독가로도 유명하다. 애독서로는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소설로 인간의 심리를 파고든 ‘산시로(三四郎·1908년 출간)’를 꼽는다.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책을 산(山)처럼 쌓아놓고 파묻혀 읽는 편이다. “총리가 된 뒤엔 ‘공부 안 해서 잘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편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는 사람’(아사히신문)이란 평가도 있다. 이시바는 호텔 바에서 ‘카레라이스 시킬 수 있나요’라고 묻는 등, 분위기를 열심히 살펴 행동하는 일본인의 눈으론 이해 못 할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술은 좋아하지만 술자리는 싫어해 피하는 편이다. 2022년부터 ‘라멘(라면) 문화 진흥을 목표로 하는 의원 연맹 회장’도 맡고 있다.
이시바는 한일 관계를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다카이치에 비해 한일 관계 측면에서 안정적 관계를 유지할 총리가 될 전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A급(주요)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하지 않는다. 다카이치가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겠다”며 보수층에 호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2019년 아베 당시 총리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등 대(對)한국 경제 제재를 할 때 그는 “지역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하는 조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과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언급했고, 2019년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 파기’ 사태 땐 자신의 블로그에 “우리 나라(일본)가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썼다. 2020년 재일 교포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조선반도(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를 출간하자, 이를 추천 도서로 꼽았다. 다만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하자는 자민당 개헌안엔 동의하고 있다.
이시바가 차기 총리에 오르게 되면서 한일 관계는 기시다 때 개선된 관계를 비교적 차질 없이 이어갈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많다. 김석기 국회 외교통일위원장(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은 “국제 정세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본도 안보 문제를 중시하는데, 이시바는 윤 대통령과 안보 면에서 협력해야 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시바는 윤 대통령 취임 후 발전시켜온 한·미·일 3국 협력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져 3각 협력 틀 가운데 양국 관계 발전을 도모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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