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청와대 관저에서 맴돌던 의문
불통 논란으로 청와대 개방도 퇴색
대통령실 이전 취지 되새겨 봐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 가족 친지들과 함께 청와대를 둘러본 뒤 머리를 맴돌던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는 왜 이곳에 들어오지 않고 무리한 이전을 추진했던 것일까.’
제왕적 대통령제의 상징적 공간인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국민 곁에서 소통 행보를 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취지는 어찌 보면 가히 혁명적 발상이었다. 과거 왕조 시대의 유물인 왕궁 개방부터가 혁명적 체제 변화에 동반된 것이었다. 현대 들어서도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탄생한 이란이슬람공화국은 구체제 타파를 기념하기 위해 팔레비 왕조의 왕궁을 전면 개방해 박물관 등으로 활용했다. 권력 공간을 옮기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차원의 이전이 아니다. 과거 권력과의 단절 및 체제 전환이라는 시대사적 함의가 담긴 것이다.
민주적 대통령제 시대에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개방하고 이주한 사례가 극히 드문 것도 이 같은 정치적 무게감 때문일 터다. 2018년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역대 대통령이 사용한 관저 ‘로스 피노스’를 개방하고 관저를 이전한 게 그 흔치 않은 경우 중 하나다. 여기에도 멕시코에서 89년 만에 이뤄진, 좌파 정부로의 정권 교체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백악관의 14배에 달하는 호화 관저를 개방해 국민들에게 우파 정권의 사치와 부패를 각인시키고 좌파의 청렴함을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과거 정부의 호화 관저는 현 정권 스스로에겐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겠다는 채찍이자 반면교사의 거울이기도 했을 터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청와대 이전이 논의됐던 것도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 시위’의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안이 여의치 않아 포기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청와대 이전에 성공했더라면 청와대를 이른바 ‘촛불 혁명’의 성과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만들었을 법하다. 권력 공간을 옮긴다는 것은 그만큼 ‘혁명’에 버금가는 체제 전환을 선전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이루겠다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애당초 윤 대통령에게 이만한 다짐과 결단이 있었던 것일까. 제왕적 대통령제를 벗어나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청와대 이전의 명분은 이젠 모두가 알듯이 화톳불의 재처럼 퇴색했다. 이를 환기하면 할수록 먼지를 흩날리고 주변만 어지럽힐 뿐이다.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에서 보듯 새 대통령실과 관저 이전 공사에는 구질구질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체제 전환이란 시대사적 변화나 정치적 함의가 사라진 상황에서 청와대는 아무 맥락 없이 덩그러니 거기 있었다. 무미건조한 명칭 외에 별다른 해설이 달려 있지 않은 청와대 각 건물과 공간들은 무엇을 반추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역사를 반성하거나 성찰하는 전시물은 없었다. 아무런 역사적 교훈을 찾을 수 없었고 개방과 소통의 변화도 체감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청와대는 의미가 텅 비어 있는, 무색무취한 기표일 뿐이었다. 개방과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던 청와대는 되레 ‘무리한 이전’ 때문에 비어버린 집으로서, 어쩌면 불통의 상징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굳이 청와대의 용도를 찾자면 사진찍기 배경 무대쯤 될까. 쓱 한번 둘러보고 바삐 지나가는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로선 한국 대통령들이 거주하고 집무했던 장소 앞에서 사진 한번 찍는 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그저 단체관광 패키지 코스 중 하나로 전락한 것이다. 다만 관저를 찾은 몇몇 한국인들은 이런 말들을 궁싯거렸다. “대통령 부부는 이 좋은 데를 왜 안 들어온 걸까.”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하나는 남긴 셈이다.
송용창 뉴스1부문장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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