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비핵화 회의론 불지핀 IAEA … 전문가 "트럼프 당선땐 核용인"
하노이노딜에 美핵군축론 확산
核보유 인정·관리 주장 힘실려
美 민주·공화당 정강에도 영향
북한도 핵군축 협상력 늘리려
핵탄두 증산·다종화에 힘쏟아
러 "비핵화 문제 종결" 편들기
외교부, 그로시 발언 평가절하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26일(현지시간) AP통신과 인터뷰에서 불쑥 꺼낸 '북한 핵보유 인정' 발언이 국내외에서 번지고 있는 북한 비핵화 '회의론'에 더욱 불을 지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날 그로시 사무총장 발언은 2019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비핵화 대화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미국 조야에 등장한 '북핵 군축론'의 연장선에서 나온 현실론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그로시 사무총장 발언으로 재점화된 논쟁이 미국 차기 행정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된다.
앞서 그로시 사무총장은 2020년 2월 카네기국제평화재단 강연회에서 "북한의 핵보유는 불법이며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실제 핵보유 여부와는 별개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IAEA의 공식 입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날 북한의 불법적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북한을 사실상(de facto)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펼치며, 이에 기반한 국제사회의 대화와 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인터뷰에서 북한이 지난 13일 고농축우라늄(HEU) 시설을 공개한 것에 관해 "북한은 국제 핵 안전 기준이 지켜지는지 확인할 수 없는 광대한 핵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북한이 핵탄두를 30개 혹은 50개 갖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기 위한 노력을 주문한 점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는 북한이 차기 미국 행정부와 동등한 핵보유국의 위치에서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는 "현재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매우 우려스럽다"면서도 "대화를 위해서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매우 신중하고 외교적인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IAEA는 국제 핵을 관리하는 것이 주된 임무로 통제되지 않는 (북한) 핵에 대한 우려가 클 것"이라며 "그로시 사무총장은 북한과 현실적인 태도로 대화를 하면서 핵을 관리·통제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 같은 생각은 점차 미국에서 주류의 견해가 될 개연성이 대단히 크며,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다면 (제한적 북핵 용인론이) 더욱 주류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해 미국 조야에서는 2019년 초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 비핵화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비관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어 북·미 대화 단절이 장기화하면서 북한의 핵보유를 일부 용인하되 관리가능한 수준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위협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는 상황이다.
이를 반영하듯 앞서 지난 7~8월 차례로 공개된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강에서도 북한 비핵화 목표가 빠졌다. 2016년과 2020년 발표됐던 민주당 정강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 목표가 명시됐지만 올해 정강에선 사라졌다. 공화당도 지난 두 차례 대선 때 밝힌 정강에선 CVID를 명시했지만 올해는 한반도와 북한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다.
북한도 향후 미국과의 핵군축 협상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급 핵물질 생산 △핵탄두의 다종화·경량화·소형화 △핵투발 수단 다양화 등에 주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중국 간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유엔 안보리(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약화를 최대한 활용해 '협상칩'을 최대한 끌어모으겠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비확산체제의 큰 축인 러시아는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종결된 문제(closed issue)'로 치부하며 북한을 편드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보좌관은 2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미국기업연구소(AEI)가 '미국 안보에 대한 중국의 포괄적 위협'을 주제로 개최한 대담에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미국보다 앞서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오브라이언 전 보좌관은 "우리는 지난 (트럼프) 정부에서 마침내 몇 개의 원심분리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면서 "그러나 북한과 이란이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은 원심분리기를 가동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북한과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우리보다 앞서 있다"며 "우리는 핵(무기) 게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한편에서는 그로시 사무총장의 이번 발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입장도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인터뷰에서 그로시 사무총장이 북한이 핵을 보유(possess)했다고 표현한 것은 보편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한 발언"이라고 선을 그었다. 박 교수는 다만 "만약 IAEA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취지로 말한다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며 "IAEA가 스스로 존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외교부도 이날 "북한 비핵화는 한반도 및 전 세계 평화, 안정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자 국제사회의 일치된 목표"라며 그로시 총장의 인터뷰 발언을 평가 절하했다. 외교부는 "그로시 사무총장은 지난 16일 제68차 IAEA 총회 개막연설과 연례 북핵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불법 핵 프로그램이 안보리 결의의 명백한 위반이며, 북한이 안보리 결의 의무를 완전히 이행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비확산 체제를 유지해야 할 IAEA 수장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실언"이라며 "북한은 국제법상 절대 핵보유국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안보전략을 다시 생각하고 나아가 '자체 핵무장'이라는 다른 선택지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성훈 기자 / 김덕식 기자 /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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