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차려입고 누워버린 여자 현대인의 고립·단절을 마주보다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9. 2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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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름그린&드라그셋
亞 최대전 'Spaces'
쓸쓸한 레스토랑
물 없는 수영장 등
대규모 설치작품 전시
작품 속으로 들어가
탐색하며 보는 작품
현대인의 외로운 삶
다층적 면모 드러내
엘름그린&드라그셋 'All Dressed Up'(2022). 송경은 기자

잘 차려진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한 여성이 홀로 앉아 있다. 테이블 사이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화면을 보는 얼굴엔 표정이 없다.

북유럽 출신의 세계적인 아티스트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공간 설치작품 'The Cloud(더 클라우드 레스토랑)'(2024)와 그 안에 놓인 조각작품 'The Conversation(대화)'(2024)이다. 제목과 달리 서로가 마주 앉아 눈을 맞추고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는 이곳에 없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제3자의 시선으로 직접 공간에 들어가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온다. 우리를 타자화함으로써 현대사회의 공허함을 드러낸 것이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아시아 최대 규모 전시 'Spaces'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내년 2월 23일까지 열린다. 1995년부터 한 팀으로 활동해온 덴마크 출신의 마이클 엘름그린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 드라그셋의 30년 협업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는 이들의 작업 전반을 조명한다. 수영장과 집, 레스토랑, 주방, 작가 아틀리에 등 실물 크기의 대규모 공간 설치작품 5점을 포함해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작은 조각, 설치, 사진, 회화를 폭넓게 아우른다.

엘름그린&드라그셋 'The Conversation'(2024).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특히 독립적인 작품이자 다른 작품의 배경이 되는 두 작가의 공간 설치작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허구의 세계에 관객이 실제로 걸어 들어가도록 끌어들여 공간을 탐색하게 만든다. 정형화된 전시장 형태인 화이트 큐브를 해체하고, 이를 통해 두 작가는 현대 도시 속 삶의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관객들은 영화 세트장처럼 제작된 작품 속에 들어가 작가가 곳곳에 남겨놓은 단서들을 살펴보면서 각자의 서로 다른 경험과 감정을 떠올리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대형 수영장을 옮겨 놓은 듯한 'The Amorepacific Pool'(2024)에는 정작 물도, 수영하는 사람도 없다. 소년과 남성 형상의 백색 조각들이 수영장을 무대로 등장하지만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해 있을 뿐 같은 공간에서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두 작가는 물이 빠진 수영장을 통해 공공장소의 쇠퇴와 공동체의 상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의 제목과 상반된 이야기는 전시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다. 한 여성이 놀이공원 퍼레이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동물 코스튬을 입고 소파에 쓰러져 잠든 모습을 표현한 조각 작품 'All Dressed Up(멋지게 차려입다)'(2022)이 대표적이다. 마치 행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가면만 벗어던진 채 쓰러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잘 차려입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라는 점을 살린 작품도 눈길을 끈다. 거실과 주방, 침실, 서재, 화장실 등을 갖춘 140㎡ 크기 집 형태의 공간 설치작품 'Shadow House'(2024)에 들어서면 현관 벽면 거울에 "다시는 보지 말자!"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 방처럼 꾸며진 방바닥엔 아이가 두고 간 듯한 한글 그림책이 놓여 있다. 이런 단서들을 마주하면서 관객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누가 사는 집일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끊임없이 상상하게 된다.

동성애자인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1994년 덴마크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연인으로 발전해 아티스트 듀오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0년간의 교제 끝에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이들의 예술적 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엘름그린&드라그셋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전시장이라는 공공 공간에 주택, 레스토랑 같은 사적인 공간을 겹쳐 놓음으로써 발생하는 방향 상실이 관객에게 주체성을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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