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부당 합병’과 국민연금의 이중 플레이?[전성인의 난세직필](30)
지난 9월 24일, 다수의 언론은 국민연금공단이 2015년에 있었던 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피해를 봤다며 삼성물산 법인과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 등 8명의 자연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여러 측면에서 이번 소송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왜 그런가? 국민연금이 부당 합병으로 가입자가 입은 손해를 보전받기 위해 이재용 전 부회장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면 잘된 일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들은 필자의 평가가 납득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독자들께는 이 글을 끝까지 읽을 때까지 최종 판단을 잠시 유보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국민연금재정과장, 국회의원들에 거짓말
우선 국민연금은 이런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도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지난 9월 13일이다. 그런데 1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그 흔한 보도자료 한 장 없었다. 또 피고 명단에 국정농단의 최정상에 있으면서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쏙 빠져 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국민연금의 주무과장인 박민정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재정과장의 태도였다. 박 과장은 지난 9월 20일 야당 국회의원 11명과 시민단체들이 주최한 국민연금 손해 회복 방안 모색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의 손해배상 소송 제기와 관련해 손해배상 소송의 시효가 만료되기 전에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취지로 답변하면서, 다만 피고의 범위와 소송 가액 그리고 손해배상 청구의 논리 등에 관해서는 소송이 제기될 때까지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참석자는 아직 국민연금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은 실제로 이 답변을 하기 1주일 전에 이미 국민연금은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박 과장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 앞에서, 특히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으로 이 토론회의 사회를 본 김남희 의원을 마주 보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국민연금과 보건복지부는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싶어했던 것일까? 고민 끝에 나는 그 진실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이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된 논거를 제시해 보려고 한다.
‘2020년 소송서 가해자 편’ 진상 규명해야
국민연금의 이런 어정쩡한 입장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2020년부터 2022년 사이에 있었던 한 건의 소송이다. 2022년 11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2민사부는 구 삼성물산의 주주들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왜곡했던 정부의 부당한 행위 때문에 손해를 입었으니 국가가 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정부와 국정농단 관련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2020가합600079 손해배상(기) 사건)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즉 기본적으로 손해배상을 할 정도로 국가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판결이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상급심에서는 뒤집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국민연금에 집중해 보자.
이 판결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점은 이 재판에 국민연금이 피고 측, 즉 정부 쪽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국민연금은 구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사건에서 이중적 지위에 있다. 하나는 국정농단 사건으로 뇌물을 받은 대통령과 그 휘하인 보건복지부 장관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로 내부의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부당한 합병에 찬성한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민연금은 가해자에 가깝다.
또 다른 측면은 이런 부당 합병으로 국민연금이 실제로 거액의 손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국민연금은 피해자이고, 그 피해는 궁극적으로 국민연금 가입자에게 전가된다. 그래서 국민연금에 가입한 대다수의 국민은 국민연금이 빨리 불법행위자들을 상대로 그 손해를 보상받는 조치를 하라고 그동안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위 사건에서 국민연금은 가해자인 정부 측 보조참가인으로 들어갔다. 물론 국민연금이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를 펼쳤는지는 더 상세한 자료를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으나, 적어도 외양만으로 판단하면 ‘아, 국민연금인 내가 몇몇 사람 때문에 조금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찬성한 것은 아니야. 찬성은 자발적인 결정이었어’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판결문에는 국민연금이 그 의사를 지배당할 정도로 압박을 받은 것이 아니어서 그 주주권 행사는 하자 없는 것이라는 취지의 판단이 포함돼 있다. 쉽게 말해 국민연금은 ‘난 팔이 조금 비틀리고 손해도 봤지만 그래도 행복해’ 이런 식이다.
혹자는 이것이 국민연금의 입장을 곡해한 것이라고 펄쩍 뛸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국민연금이 ‘나는 부당하게 팔이 비틀려서 찬성했을 뿐이고, 그 때문에 손해를 봐서 속이 쓰리다. 빨리 이 손해를 보상받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면 피해주주인 원고와 목소리를 함께해야 했다. 예를 들어 원고의 보조참가인으로 참여해서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게 그 의사를 굽힐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피눈물 나는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찌 됐건 법원은 국정농단 판결과 ISDS 중재재판부의 시각과는 달리 정부를 면책했다. 그런데 2년이 흐른 지금 국민연금이 나서서 “난 손실 입어서 몹시 슬퍼. 그러니 너희들 책임져”라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나는 이게 이번 해프닝의 진면목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소송에서 국민연금이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과거 2020년 소송에서는 가해자와 같은 편에 섰다가 지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지적받지 않겠는가? 당장 삼성 쪽에서는 “야, 국민연금. 너 과거에 합병에 찬성했고, 그 의사결정은 자발적이라고 했잖아. 그럼 이익을 보건 손해를 보건 그건 네가 감수해야지. 왜 내게 와서 시비야?” 이렇게 반박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이번 국민연금 소송이 ‘보여주기식 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번 소송보다 2020년 소송이다. 지금이라도 2020년 소송에서 왜 국민연금이 피해주주들 쪽이 아니라 가해자 쪽에 서게 됐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손해배상 청구의 논리마저 스스로 봉쇄해 버렸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일개 과장에게 농락당한 보건복지위 국회의원들의 분발이 필요하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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