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박경리, 그는 '슬픔의 면류관'을 벗은 적이 없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9. 2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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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소설은 광휘로 가득하지만, 그의 삶은 빛보다 어둠에 가까웠다.

그는 책에 쓴다.

만약 박경리 작가의 인생이 환희의 연속이었다면 독자는 그의 문학에 탄복했을 리 없다.

소설책을 수천 부 인쇄하더라도 예술로서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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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그렇게 슬픔을 온전히 껴안는 일이다

박경리 소설은 광휘로 가득하지만, 그의 삶은 빛보다 어둠에 가까웠다. 고통의 빈도와 총량이 컸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가. 남편은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됐고, 곧이어 어린 아들이 사망하는 참척의 슬픔이 겹쳤다. 화재로 집을 잃었고, 사위(김지하 시인)의 투옥은 멸문에 가까운 고난이자 시련이었다. 당시 돌도 안 지난 손주를 업고 옥바라지에 전념했으니, 그는 인생의 전성기에도 슬픔의 면류관을 벗은 적이 없다.

생의 말년까지도 고통은 인간 박경리를 흔들었다. 말년엔 폐암 선고를 받았고, 몇 개월 뒤 뇌졸중이 오면서 그는 끝날까지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온화해 보이는 박경리의 옛 사진에선 평온한 어머니상이 아닌, 한 인간의 말라버린 피눈물과 깊은 주름살부터 읽어내야 옳을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박경리의 연세대 원주캠퍼스 강연집이다. 강원도 사택에서 멀지 않았던 대학에서 그는 젊은 학생들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이 책은 박경리 문학세계뿐 아니라 문학의 심부(深部)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거대한 관문이다.

박경리 작가에게, 문학의 쓸모란 세상을 '바로' 보는 일이었다.

세상은 더럽고 치사하며, 협잡으로 가득한 난장판이다. 그러나 문학은 세상의 정면을 작가의 눈을 거쳐 독자에게 보여준다. "바로 보게 되면 그것은 지혜로움이며, 인생을 꽉 차게 살 수가 있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존엄하게 존재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

세상을 직시하고, 생의 의미를 짚는 문학은 어떤 문학일까.

박경리의 오랜 명문장이 여기서 나온다. 그는 책에 쓴다. "작가는 슬픔을 사랑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슬픔을 거부해선 안 되며, 그 슬픔을 온전히 껴안는 것이 작가의 업이다.

만약 박경리 작가의 인생이 환희의 연속이었다면 독자는 그의 문학에 탄복했을 리 없다. 작가는 모름지기 실패하고 절망하고 몰락한 자의 비애를 담아낼 때 오히려 독자의 너른 관심을 받지 않았던가.

책에는 문학이 상품인가, 아닌가에 대한 작가의 질문도 담겼다.

박경리 작가에게 문학은 '상품'이 될 수 없었다. 상품은 복제 가능하지만 문학은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이란 이유에서다. 소설책을 수천 부 인쇄하더라도 예술로서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뿐이다. 남이 간 길, 남이 만들어놓은 틀을 뒤쫓지 말라고도 그는 말했다.

본래 그는 시인을 꿈꿨다. '소설과 진실'은 그의 본업이지만, 그는 시를 놓지 않았다. 원주 토지문화관엔 박경리의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고개를 숙이게 되는 시다.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박경리 시 '우리들의 시간' 전문)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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