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언의 공연산책] 뮤지컬 '리지', 매혹적인 여성 락 뮤지컬의 진수
캐스팅: 이봄소리, 이아름솔, 제이민, 이영미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좌석: 8열 중앙
"리지 보든 도끼로 엄마한테 마흔 번, 아빠한텐 아니야 마흔 하고 한 번 더"
미국 매사추세츠주 한 마을에 위치한 부유한 저택.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던 어느 여름날, 그곳에 살던 보든 부부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된다. 현장의 모습은 참혹했다. 시신은 도끼로 수십 번 난도질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집안은 온통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딸이 살던 평범하고 번듯한 가정에서 벌어진 믿지 못할 살인사건이었다. 경찰이 이 잔인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 헤맨 결과 마침내 용의자를 체포하게 되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집안의 조신한 막내딸, 리지 보든이었다.
뮤지컬 '리지'는 1892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미제 살인 사건인 '리지 보든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리지'는 도끼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는 리지 보든, 그녀의 언니 엠마 보든, 보든 가의 가정부인 브리짓 설리번, 리지의 이웃이자 친구인 앨리스 러셀까지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여성 4인극으로, 강렬한 사운드가 인상적인 락 장르의 뮤지컬이다. 2020년 초연 때부터 독특하고 신비로운 매력으로 매니아층을 형성한 뮤지컬 '리지'는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전개로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대학로 락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작품의 개요만 보면 1800년대라는 클래식한 배경과 락이라는 장르가 잘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자연히 생겨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 상반된 분위기가 무대에서 어떻게 어우러질까 하는 기대가 피어오른다. 실제 무대에서 본 '리지'는 처음에 가졌던 의문을 완벽히 무너뜨리고 기대는 배 이상으로 충족시키는,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거친 울림과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는 관객들의 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락 넘버의 향연이 '리지'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스탠딩 마이크와 핸드 마이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모습도 신선하고 인상적이다.
뮤지컬 '리지'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공포스럽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막내딸이 휘두른 도끼에 맞아 숨진 사건이라니, 듣기만 해도 섬뜩하지 않은가. 특히 한두 번도 아니고 마흔 번, 마흔한 번씩이나 도끼를 내리쳤다는 것은 어느 고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시사 프로그램이나 범죄 다큐멘터리에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범죄 실화는 뮤지컬이라는 무대를 만나 놀라우리만치 매력적으로 변모한다. 뜨겁고 끈적한, 용암 같은 폭발력을 지닌 채로 말이다.
4명의 인물은 무대 위에서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생기를 띈다. 특히 사건의 주인공, 리지 보든의 임팩트는 가히 놀랍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도끼로 살해하고도 증거가 부족해 무죄로 풀려난 잔악무도한 범죄자'라는 타이틀에 갇힌 실제 인물과는 다르게 뮤지컬 속의 리지는 미스터리를 간직한 소녀이자 억눌린 자아 속에서도 사랑과 자유를 꿈꾼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언젠가 고통을 벗어나 드넓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기도한 작은 아이의 염원은 새하얀 비둘기의 날갯짓만큼이나 처절하고 아름답다.
엠마, 앨리스, 브리짓 세 인물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리지와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들의 무대는 끈끈하고 짜릿하다. 리지의 범행을 감싸도 돌기도, 그녀의 신변을 날카롭게 위협하기도 하는 세 여인의 에너지는 무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밖으로 철철 흘러넘친다. 데일 듯 뜨거운 이들의 퍼포먼스는 1분 1초 시간이 지나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순간순간을 포착해 담아두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들의 강렬한 무대는 잔인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이 상반된 느낌의 아이러니는 뮤지컬 '리지'의 서사에 힘을 실어주는 독특한 포인트이다.
리지와 앨리스, 엠마, 브리짓은 엄밀히 따지자면 거대한 살인사건의 범죄자와 그 방관자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들의 노래에 열광하며, 이들의 구호에 맞춰 발을 구르고 박수를 친다. 뮤지컬 '리지'가 담고 있는 리지 보든의 이야기는 그만큼이나 묘한 설득력이 있다. 단순히 락의 파과적인 에너지에 기대어 관객들을 유혹하는 작품이 아닌, 나름대로 탄탄한 골조를 갖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건 속에 숨겨져 있던 미스터리와 인물들 간의 관계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리지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서서히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힘 있는 넘버들은 뮤지컬 '리지'의 이야기와 엄청난 케미스트리를 이루며 관객들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귀를 사로잡으며 관객들을 그물에 걸린 물고기마냥 '리지'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꽉 붙들어둔다. 특히 넘버의 템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다양한 무대를 선보이는 점이 인상적이다. 완급 조절의 정석과도 같은 모습이다. 단순히 음악의 리듬을 즐기다가도 삽시간에 깊은 감정의 늪으로 끌려들어 가게 만든다. '리지'의 세계는 그렇게도 종잡을 수 없게 다채롭고 환상적이다.
뮤지컬 '리지'의 배우들은 배역에 꼭 들어맞는 모습으로 완벽한 변신을 선보인다.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목소리와 눈빛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담아내며 '리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이번 시즌에 새롭게 합류한 이아름솔 배우의 활약이 놀랍다. 이아름솔 배우는 리지의 언니, 엠마 보든 역할을 맡아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강렬한 연기를 펼치며 관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특유의 쩌렁쩌렁한 성량과 빼어난 가창력으로 락 넘버까지 멋지게 소화하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다.
뮤지컬 '리지'는 잔혹하면서도 매혹적인,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락 뮤지컬의 강렬함을 고수하면서도 그 안에 은은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품고 있다.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락 뮤지컬 무대를 만나보고 싶다면 점점 서늘해지는 가을날, 색다른 경험을 선사할 '리지'를 만나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한편, 뮤지컬 '리지'는 오는 12월 1일까지 공연된다.
글, 강시언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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