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물이 만들었다"…성파스님이 빚어낸 선과 예술의 조화
"그림으로 200년 후 사람과도 대화"…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 무료 공개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어떤 사람은 붓으로,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어떤 사람은 손톱으로 그린다고 합니다. 나는 물로 흘리고 바람으로 날리는 것을 시도해봤습니다. 바람과 물이 만든 것입니다." (성파스님)
대한불교조계종의 정신적 지주인 종정 성파 대종사가 선(禪)과 예술을 결합한 개성 있는 창작물을 공개 전시한다.
예술의전당은 서울 서초구 소재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성파스님이 40여년간 이어온 예술 활동을 소개하는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 - COSMOS'를 28일 개막한다.
60년여년의 수행 이력 못지않게 미술 활동으로도 주목받은 성파스님이 40여년간 작업한 2천점을 훌쩍 넘는 결과물 가운데 1980년대에 선보였던 금니사경에서부터 옻칠 회화, 최근에 만든 설치 작업물 등 120여점이 관람객과 만난다.
전시는 '태초'(太初), '유동'(流動), '꿈'(夢), '조물'(造物), '궤적'(軌跡), '물속의 달' 등 모두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태초'에서는 초월적 시공간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우주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유동'에서는 물과 바람 등 유동성이 있는 요소를 활용해 에너지를 보여 준다. '꿈' 섹션에는 인간과 동물 혹은 기하학적 형태를 섞은 무의식의 세계가 펼쳐진다. 성파스님이 도자와 옻칠을 결합해 칠예 도자 장르를 개척한 과정은 '조물'에, 그의 예술이 변화하는 과정은 '궤적'(軌跡)에 소개된다. '물속의 달'에서는 물질과 정신,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초월하는 작품이 있다.
단연 돋보이는 재료는 옻이다. 표면에 거즈처럼 얇은 헝겊을 대고 옻칠을 반복해 완성한 도자기 외에 안료와 옻을 섞어서 만든 물감으로 그린 회화 작품, 옻판에 옻을 칠해 민화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듯한 화려한 그림도 전시한다.
옻에 대한 성파스님의 예찬은 남다르다. 성파스님은 전시회 개막을 하루 앞두고 2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옻이라는 물질이 그림을 그릴 때, 예술을 할 때 내가 지금까지 사용한 물질 중에서 제일 좋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사람 키보다 큰 여러 개의 검은 기둥은 창작 재료로서 옻의 가능성을 실감하게 한다. 거대한 숯덩이처럼 표면이 딱딱하지만, 그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삼베에 옻을 칠한 뒤 어느 정도 굳어졌을 때 모양을 만들고 옻을 덧칠해서 딱딱하게 만든 것이다. 어두운 공간에 서 있는 검은 기둥은 우주 공간에 외롭게 떠도는 소행성, 혹은 지구가 탄생하기 훨씬 전의 미지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스님은 옻의 내구성과 방수성을 보여주고자 앞서 자개 공예와 옻칠로 재현한 반구대암각화를 경남 양산시 소재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 수조에 설치하기도 했다. 암각화 재현품을 이번 전시에 옮겨오지는 못했지만, 옻의 특성을 알릴 수 있도록 한쪽에 수중 회화를 설치했다.
스님이 오랜 기간 공들인 것이 전통 한지 제작이다. 수십 년 전 고령의 장인을 찾아가 한지 제법을 익혔고,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통도사에 손수 닥나무를 심고 가꾸고 있다. 그 결실의 일부가 전시장에 내걸렸다.
가로 150㎝, 세로 210㎝ 안팎의 대형 한지에 안료와 옻을 섞은 물감을 흘려 붓고 바람에 말려 제작한 작품이다. 붉은색, 녹색, 푸른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이 불규칙하게 강렬한 형태로 뒤섞여 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일부, 혹은 구글맵이 제공하는 오지 위성사진을 연상시킨다.
먹칠한 검은 종이에 금니(金泥)로 글자를 쓴 금니사경도 눈길을 끈다. 성파스님이 40대 때 작업한 것들이라서 그의 예술 활동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통상 금니는 금박 가루를 아교에 개서 만들지만, 성파스님은 아교보다 신축성이 좋은 민어 부레를 끓여서 만든 풀을 사용했다.
금니사경 전시작은 한없이 크고 깊은 부모의 은혜를 되새기고 이에 보답하라는 붓다의 설법을 담은 경전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다. 한 글자를 쓸 때마다 세 차례 절하는 '일자삼배'로 정성을 쏟았다는 이야기와 검은색과 금색의 강렬한 대비가 경전 속 가르침의 무게를 전한다.
이밖에 성파스님이 중국까지 가서 수년간 사사한 산수화, 서예와 그림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옻칠 작품 등 다양한 작업물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전시를 준비한 실무팀은 매달 통도사를 찾아가 성파스님의 작품을 2천500점 정도 조사했는데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전했다. 예술의전당 측은 당연한 듯 성파스님을 성파 작가로, 그의 작업물을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스님은 "나는 내가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것(전시품)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 생활 속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어색해했다.
"이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밭도 매고 꽃도 가꾸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승려로서 아침에 예불도 모시고 큰절에서의 생활을 다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일(예술 작업)은 따로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니라 짬이 날 때 합니다. 이것도 하다가 저것도 하다 보니 나온 것입니다. 산에 나무도 많이 심어놓았는데 가져올 수 없어서 전시를 못 합니다." (웃음)
성파스님은 작업물이 시간을 뛰어넘는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대화라는 게 말로써 하는 것이 있고 문자로 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술은 세계 공통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림은 본다고 하기보다는 독화(讀畵),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 시대에 많은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 남기면, 앞으로 100년 혹은 200년 후 사람과도 대화를 할 수가 있겠죠. 나도 옛날 성현, 심지어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의 말씀을 읽을 때 대화하는 마음으로 봅니다"
1939년 경남 합천 출생인 성파스님은 월하스님을 은사로 1960년 사미계를, 1970년 구족계를 각각 받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부장·교무부장·규정부장, 통도사 주지, 학교법인 영축학원 이사장, 조계종 원로위원을 지냈고 2014년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에 올랐다. 2018년에 불보사찰인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큰어른)으로 취임했으며 2021년 12월 조계종의 상징적 최고 지도자인 종정으로 추대됐다. 염색, 산수화, 금니사경, 옻칠 등으로 개인전만 20차례를 넘게 했다.
전시는 28일부터∼11월 17일까지이며 연령 제한 없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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