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커피… 한국인은 욕망을 먹고 취향을 마셨다[북리뷰]
김동주·김재원·박우현·이휘현·주동빈 지음│서해문집
보리밥마저 귀했던 1960년대엔
흰 쌀밥은 ‘잘 살고싶다’는 열망
휴식·사교 상징이었던 믹스커피
이젠 취향과 개성 표현 수단으로
부동산·가전·영화·음악·관광…
소비패턴의 변화로 읽는 한국사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한 현대의 소비는 일상 그 자체다. 무엇이든 스마트폰을 통해 클릭 몇 번이면 주문할 수 있는 시대에 “소비는 곧 삶”이라는 말은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늘어가는 배달 음식과 택배 상자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국내 다섯 명의 역사학자가 모여 최근 출간한 ‘소비의 한국사’가 짚어낸 것은 바로 ‘시간’과 ‘역사’다.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쌀밥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연구원인 김동주는 우리 사회에서 쌀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정서와 삶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인기 만화 ‘검정 고무신’에 등장하는 기영이네 가족이 쌀밥에 기뻐하고 고난 속에서 쌀 부족을 걱정하는 모습은 그 사회적 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한국인의 주식인 쌀에 대한 기영이네 가족의 열망은 특히 ‘내가 생산하고 남에게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강해진 한국인의 공통 정서다. 쌀이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넘어 “‘잘 살고 싶다’는 사회경제적 욕망”이 한데 모여 응축된 먹거리다.
박정희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쌀에는 새로운 서사가 추가됐다. 1960년대 쌀 소비 억제와 혼분식 장려 운동은 경제적 풍족함이 아닌 급격한 인구 증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건강과 영양이라는 이유로 포장된 밀과 보리는 당시 정부가 늘어난 인구수를 감당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1970년대까지 농가의 주식은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에 가까웠고 사실 30%에 가까운 국민학생(현 초등학생)들은 쌀밥도 보리밥도 아닌 점심 도시락 자체를 지참하지 못했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물의 역사는 또 어떠한가. 물은 인간이 가장 원초적이고 일상적으로 해온 소비다. 그러나 물을 얻는 방식과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오늘날은 바야흐로 ‘생수의 시대’를 맞았지만 1800년 무렵 한성에는 함경북도 북청군 출신의 물장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강이나 깨끗한 우물에서 길어 온 물을 도시민들에게 배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양쪽에 18㎏ 무게의 양동이를 짊어지고 매일같이 한성을 오갔던 물장수는 오늘날 각 가정에 생수를 나르는 배달 기사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식품의 역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부의 혼분식 장려는 대표 서민 음식인 라면을 등장시켰다. 2020년 기준 연간 라면 소비량은 79.7개로 세계 1위 소비국에 오른 한국이지만 라면은 의외로 역사가 짧은 음식이다. 국내 쌀생산량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인구는 지속해서 증가하던 1960년대, 정부는 쌀의 대체재로 라면을 찾았다. 1963년 삼양식품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라면산업을 열었고 라면은 “식량난 해결의 역군”이라는 지위까지 얻었다. 지금 보면 터무니없지만 “쌀보다 영양상으로 라면이 좋다”는 문구가 등장하고 교육 프로그램에서 라면 조리법을 설명해주는 등 라면은 서민 음식으로 안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에 있었다.
커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현대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기호식품이다. 커피는 우리 일상 속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줄곧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았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변주됐다. 인스턴트커피와 믹스커피가 대세를 이뤘던 과거에는 회사원들에게 사교의 도구이자 휴식의 상징이었고 커피전문점이 늘어난 현재에 이르러서는 커피의 산지, 원두의 종류, 로스팅 정도에 따라 맛과 향을 구분하고 취향에 맞는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커피는 이제 단순한 음료가 아닌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됐다.
식음료에서 시작해 경제 부흥기를 거치면서 한국인의 소비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책의 중반 이후에 소개되는 부동산 시장과 가전제품의 변화는 곧 한국인의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음악과 영화, 관광은 대중의 취향과 문화의 확립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나아가 인간의 욕망과 중독을 자극하는 소비 형태인 장난감과 도박, 마약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소비가 사회 규범과 법의 경계에 닿는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라면과 커피, 술 등 우리를 둘러싼 대중적인 식품의 역사를 다룬 책은 낯설지 않다. 다만 이 책이 짚어낸 소비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소소한 인물들은 단순히 역사를 정리한 것을 넘어서 삶이라는 층위를 더한다. 혼분식 장려 운동 속에도 흰 쌀밥을 먹기 위해 가정용 절구를 장만한 이들부터 공용전에서 수돗물을 몰래 훔쳐먹었던 물도둑까지 인간미가 느껴지는 동시에 욕망의 존재로 보이는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있는 책은 이것이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시대가 변하고 어느새 밥보다는 빵과 면이 좋다는 이들이 등장할 만큼 한국 사회는 풍족해졌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있고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다정함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흰 쌀밥의 감동이 그리울 때쯤 이 책을 들춰보게 될 것 같다. 320쪽, 2만1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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