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우정’ 영풍·고려아연, 지분 희석·ESG 리스크에 폭발 ②
[비즈니스 포커스]
영풍 장형진 고문 일가와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일가는 선대부터 이어온 공동경영 정신을 상대방이 먼저 파기했다고 겨누고 있다.
양측 갈등은 2022년 고려아연의 최윤범 회장 취임 이후 3세대로 오며 소통이 줄고 각자의 경영권 강화와 비즈니스 모델 확장 및 신성장동력 사업 협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쌓이며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아연 기타비상무이사를 맡고 있는 장 고문은 지난해 고려아연이 개최한 총 13번의 이사회 중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의안을 다룬 9월 이사회에만 불참했다. 현대자동차 해외법인 ‘HMG글로벌’은 당시 고려아연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해 5272억원을 투입, 고려아연 주식 104만 주가량을 취득했다. 고려아연 전체 지분의 약 5%에 해당한다.
장 고문은 2022년 8월 ‘한화H2에너지USA’를 대상으로 유증하는 안건을 결의했을 때도 불참했다. 불참을 통해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지분 희석에 분노한 영풍
vs “폐기물 떠넘겨 고려아연 ESG 리스크 ↑”
영풍은 지난 3월 고려아연이 HMG글로벌을 상대로 실시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의한 신주 발행을 무효로 해달라며 서울중앙지법에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영풍이 고려아연 신사업의 중요한 협업 파트너인 현대차그룹과의 협력을 무효로 만들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자 고려아연도 참을 수 없었다. 영풍이 제기한 HMG글로벌 대상 신주발행 무효소송은 두 가문의 갈등을 표면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트리거였다.
반면 고려아연의 역린은 영풍이 떠넘긴 석포제련소 폐기물 처리 문제였다. 최 회장이 취임 이후 ESG를 강조하며 환경경영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아연이 석포제련소 폐기물 처리를 떠맡는 것은 상당한 경영 부담이자 배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6월부로 고려아연은 영풍과의 황산취급대행 계약도 종료했다. 영풍은 최근 보도자료에서 “고려아연이 지난 수십 년간 양사가 유지해온 공동 비즈니스를 칼로 무 자르듯 끊어버렸다”고 했지만, 고려아연은 “위험물질인 황산 취급을 고려아연에 강요하는 위험의 외주화이자 대주주의 횡포”라고 비판했다.
영풍 석포제련소는 시설 노후화와 비용 문제로 제련소 운영에서 발생하는 산업폐기물 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고려아연에서 약 40년간 근무한 이제중 부회장(최고기술책임자·CTO)은 9월 24일 기자회견에서 당시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영풍 석포제련소에서 카드뮴 등 배출 사건이 문제가 되자 영풍이 고려아연에 해결을 요구했고 이를 고려아연이 거부하면서 갈등이 표면화됐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영풍이 석포제련소 산업폐기물 처리를 고려아연 측에 떠넘기려 했고 최윤범 회장이 반대하자 장 고문과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주장했다.
실제 고려아연은 영풍 석포제련소 폐기물 처리 문제로 지난 몇 년간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동업자 관계이자 대주주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간 직접적으로 반대하기보단 경영 부담을 감수해왔다.
2021년 12월 고려아연이 ESG 경영을 강화하며 ESG 전담조직인 지속가능경영본부와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지속가능경영위원회를 신설하면서 영풍 석포제련소 산업폐기물 처리대행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지속가능경영위원회에선 영풍 석포제련소 폐기물을 고려아연이 대신 처리해준다면 고려아연의 법적·ESG 리스크가 될 수 있다며 거래중단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풍과 고려아연이 공정거래법상 지배구조가 묶여있어 내부거래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어서다.
MBK 손잡은 영풍, 명분 전쟁에서 ‘2.4조 쩐의 전쟁’으로
영풍과 고려아연은 올해 초 고려아연 주주총회에서 배당안과 정관 변경안을 놓고 사상 처음으로 표대결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빠르게 연결고리를 끊어나갔다. 고려아연은 그동안 영풍과 공동으로 진행해왔던 ‘원료 공동구매 및 공동영업 종료’를 선언했고 장 씨와 최 씨 가문의 공동 경영을 상징했던 서린상사의 경영권을 가져왔다.
영풍과 함께 쓰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풍빌딩에서 나와 종로 그랑서울로 사옥도 이전했다. 1980년대 초부터 영풍빌딩 1층 로비에 나란히 놓여 있던 장병희·최기호 창업자 흉상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다. 고려아연은 종로로 사옥을 이전하며 최기호 창업 흉상을 가져갔다.
두 창업주 중 최기호 창업주가 1980년 4월 별세하자 장병희 창업주는 먼저 떠난 최기호 창업주를 기리기 위해 흉상 제작에 착수했다. 영풍 석포제련소에서 생산된 아연과 카드뮴에,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서 생산된 순동을 더해 부평광업소(옛 영풍상사)에서 제련한 순은을 혼합해 완성됐다.
2002년 12월 장병희 창업자 별세 후 그의 흉상도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 두 창업자 흉상이 나란히 영풍빌딩 사옥 로비에 20년 넘게 자리했다. 창업주 기일이 있는 4월과 12월에는 두 가문이 흰색 꽃을 가득 담아 흉상 앞에 두고 공동 추모식도 가졌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올해 9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장 고문은 결단을 내렸다. 국내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PEF)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았다. 영풍은 MBK와 9월 13일부터 고려아연·영풍정밀에 대한 주식 공개매수에 나선 상태다. 공개매수 단가는 주당 66만원이다.
영풍·MBK는 공개매수를 통해 고려아연의 지분 최소 6.98%(144만5036주)에서 최대 14.6%(302만4881주)를 확보할 계획이다. 의결권 있는 고려아연 지분 52%를 확보해 최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겠다는 취지다. 공개매수 대금은 두 기업을 합해 약 2조1332억원에 달한다.
장 고문은 공개매수 입장문을 통해 “지난 75년간 2세에까지 이어져온 두 가문 공동경영의 시대가 이제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3세에까지 지분이 잘게 쪼개지고 승계된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경영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고 했다.
장 고문 일가는 MBK파트너스와 주주 간 계약을 체결하고 의결권을 공동행사하기로 하고 영풍 및 특수관계인 소유 지분 일부에 대해서는 콜옵션을 부여받기로 한 상태다. 이를 통해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 지분을 영풍 및 특수관계인보다 1주 더 갖게 된다. 영풍과 장 씨 일가 지분은 33.13%로 추정된다. 최 회장 측 지분은 15.65%지만 우호지분을 더하면 장 씨 일가와 비슷해진다.
양측의 여론전도 치열하게 펼쳐지는 중이다. 고려아연 측은 이번 공개매수를 ‘적대적·약탈적 인수합병(M&A)’으로 규정하고 영풍과 MBK파트너스를 비판하고 있다. 고려아연 경영권이 넘어가면 사모펀드 속성상 중국 등 해외에 매각될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기업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란 우려다.
영풍 측은 “적대적·약탈적 M&A가 전혀 아니다”며 “고려아연은 영풍의 살(자본)과 피(인력)로 낳은 자식이다. 영풍은 25.4%의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로서 2.2% 지분을 가진 경영대리인인 최윤범 회장의 전횡에 병들어 가는 고려아연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스스로 팔을 자르고 살을 내어주는 심정으로 MBK파트너스에 고려아연 1대주주 지위를 양보하면서 손을 잡고 최대주주 지배권 강화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주식 공개매수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풍·MBK는 고려아연 주가가 공개매수가를 웃돌자 9월 26일 가격 인상에 나섰다. MBK의 특수목적법인(SPC) 한국기업투자홀딩스와 영풍이 고려아연의 공개매수가를 기존 66만원에서 75만원으로, 영풍정밀은 2만원에서 2만5000원으로 각각 상향 조정했다.
공개매수 청약 기간 중 주가가 공개매수가보다 높으면 주주들이 공개매수에 응할 유인이 사라져 응모율이 낮아지기 때문에 이번 가격 인상은 주주들의 참여를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공개매수가 상향으로 ‘쩐의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투입자금도 당초 2조1332억원에서 2조4397억원으로 3000억원가량 확대됐다. 이날은 MBK가 공개매수 기간 연장 없이 가격을 인상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공개매수 종료 시점은 영업일 기준 10월 4일이다. 최 회장이 대응할 수 있는 기간은 단 5거래일뿐이다.
재계에서는 기존 공개 매수가보다 13.6% 높은 가격을 들이민 영풍·MBK에 맞서 최 회장이 우군을 확보해 대항 공개매수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최 회장은 해외 투자자들과 협업해 전략적 우군을 확보하는 데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려아연은 9월 24일 2000억원 규모의 기업어음(CP)을 발행한 데 이어 27일 추가 CP 발행을 통해 2000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무차입 경영 기조를 이어온 고려아연이 자본시장에서 차입 거래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23년 만이다. 시장에서는 이 자금이 영풍·MBK의 공세에 맞서 경영권 방어를 위한 실탄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아연은 이번 경영권 분쟁에서 명분과 지분 확보를 동시에 잡겠다는 전략이다. 2차전지 공급망의 핵심축을 떠받치는 국가기간산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동시에 1조원 안팎의 자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고려아연은 9월 2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회사가 보유한 2차전지 소재인 전구체 가공 기술에 관한 국가 핵심기술 판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국가 핵심기술 보유 기업이 되면 정부 승인을 받아야만 외국 기업에 매각할 수 있게 된다.
최윤범 편에 선 백기사는 누구
최 회장은 영풍·MBK에 대항할 백기사(우호세력)를 찾기 위해 국내외를 누비고 있다. 최근 최 회장이 일본 대형 종합상사 스미토모, 소프트뱅크, 베인캐피털, LG, 한국투자증권, 한국앤컴퍼니 등과도 접촉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이들이 우군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고려아연의 우호지분으로 분류되는 한화그룹의 김동관 부회장과도 회동했다. 최 회장과 김 부회장은 신재생에너지 사업 협업 의지를 재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그룹은 2022년 고려아연과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를 위해 자사주 7.3%와 고려아연의 자사주 1.2%를 맞교환했다. 현재 한화그룹은 주요 계열사를 통해 고려아연 지분 7.76%를 보유하고 있다.
한화그룹과 고려아연은 이 같은 투자를 바탕으로 수소·신재생에너지 사업을 공동 추진하기로 협의했고 고려아연과 한화그룹 간 사업 동맹은 최 회장과 김 부회장의 교감이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과 김 부회장은 미국 세인트폴고 동문으로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서는 한화, 현대차, LG화학, 한국타이어 등 대기업 지분(18.4%)을 최 씨 일가 우호 세력(백기사)으로 분류한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대해 이들 우호세력으로 지목된 기업들이 공개적인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다만 재계에서는 최 회장과 김 부회장의 회동을 두고 고려아연과 긴밀한 협력 체계를 유지해온 한화그룹이 경영권 분쟁에서 고려아연 측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말 MBK의 공격을 받았던 한국타이어는 최 회장의 우호주주라고 선언한 바 있다.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도 최 회장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대기업들을 포함해 최 회장의 우군으로 지목된 기업들은 MBK파트너스가 그간 고려아연의 신사업 추진에 제동을 걸었던 만큼 경영권이 넘어갈 경우 고려아연과의 비즈니스 협력에 차질이 생길 것을 크게 염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에선 이번 경영권 분쟁을 두고 “남 일 같지 않다”며 동병상련의 마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속 과정에서 막대한 상속세를 내기 위해 보유 지분을 처분하다 보면 지분이 분산되고 경영권이 약화하며 적대적 M&A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어서다.
고려아연은 현대차와는 배터리 핵심 소재인 니켈 확보를 위해 광산 공동 투자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LG화학과는 2022년 지분 맞교환과 함께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충족을 위한 원재료 발굴 등 포괄적 사업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전구체 합작사인 한국전구체주식회사(KPC)를 세운 바 있다.
다만 MBK는 그간 대기업들은 고려아연의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 최 회장의 우군이라는 관측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특히 MBK는 백기사가 거론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식 시세에 영향을 주는 소재로 사용될 수 있어 대항 공개매수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최 회장뿐 아니라 상대방도 시장 질서 교란 행위 등 법적 논란에 연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사 인덱스]
영풍·고려아연, 동지에서 원수로…협업과 분쟁의 75년史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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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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