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포유류에게 배우는 폭력에 익사하지 않는 법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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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종의 명상록이자 행동 지침서다.
시인이자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인 알렉시스 폴린 검스는 해양 포유류의 삶으로부터 인종, 젠더, 장애에 따른 차별, 자본주의적 사회구조, 식민성의 폭력으로부터 익사하지 않는 삶을 사는 지혜를 도출해낸다.
과학자가 아닌 저자가 해양 포유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찾은 것은 과학이다.
검스는 이처럼 동물들에 대한 과학적 언어를 뒤집으며, 인간사회에 겹겹이 깃든 폭력들 역시 벗겨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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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숨
해양 포유류의 흑인 페미니즘 수업
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김보영 옮김 l 접촉면(2024)
이 책은 일종의 명상록이자 행동 지침서다. 시인이자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인 알렉시스 폴린 검스는 해양 포유류의 삶으로부터 인종, 젠더, 장애에 따른 차별, 자본주의적 사회구조, 식민성의 폭력으로부터 익사하지 않는 삶을 사는 지혜를 도출해낸다. 이는 듣기, 숨쉬기, 협력하기, 경계 존중하기, 축복 보살피기 등 총 19가지의 지침으로 정리되었다. 마지막 장은 혼자, 또 함께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까지 제안한다. 그리고 저자는 선언한다. “겸허히 해양 포유류의 조언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저자는 ‘해양 포유류 수습생’을 자처한다. 의도적인 해양 포유류 되어보기 과정은 인간-동물의 이종간 경계를 허물고, 공감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함이다. 인간과 포유류의 입장을 오가며 저자는 인간 사회를 낯설게 본다. 게잡이 물범은 생물학적 가족 관계를 떠나 공동체로서 서로 돌보는데, 그 결과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졌다. 점박이돌고래는 다른 돌고래들, 황다랑어, 바닷새 등으로 이뤄진 이종간 집단을 이뤄 이동한다. 큰돌고래는 동성의 짝과 평생 동반자로 살아가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저자는 서로 더 사랑하는 인간 사회를 위해, 고래의 지혜를 따르자고 제안한다.
과학자가 아닌 저자가 해양 포유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찾은 것은 과학이다. 가장 널리 읽히는 국립 오듀본협회와 스미스소니언에서 발간한 안내서에서 검스가 발견한 것은 식민주의적인 얼굴이 드러난 과학의 언어들이다. “나는 그저 그 고래가 어떤 고래인지 알고 싶었을 뿐인데 나를 죽이려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이성애가부장제의 자본주의 구조, 그러니까 이미 나를 포획하고 있는 그물과 맞닥뜨린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저자는 “폭력적인 식민 언어를 파괴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이 책 속 언어들은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스텔러바다소(Steller’s sea cow)’라는 이름 대신 학명 ‘하이드로 다말리스 기가스’를 쓴다. ‘웨델 물범’이라는 이름도 “살인자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것”이라며 불편함을 드러낸다. 이 이름들은 이 동물들을 사냥한 과학자와 탐험가의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해양포유류와 지구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그녀’로 여성형을 쓴다. 생물학적으로 성별을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독자들의 익숙함에 조금씩 틈을 낸다.
검스는 과학이 동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에도 질문을 던진다. 상어의 특징을 설명하는 언어들은 고독한 포식자를 묘사하고 있지만, 실상 상어들은 사회성이 뛰어난 존재들이다. 들고양이고래, 혹은 피그미 범고래는 다른 돌고래처럼 뛰어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느리고 무기력하다는 설명이 붙었다. 인간의 눈에 두렵고 부정적인 대상의 특징들이 덧씌워졌다. 마치 역사적으로 흑인에게 범죄자의 프로파일이 덧씌워진 것처럼 말이다. 검스는 이처럼 동물들에 대한 과학적 언어를 뒤집으며, 인간사회에 겹겹이 깃든 폭력들 역시 벗겨내 보인다.
인종주의, 식민주의, 페미니즘과 퀴어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러운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의 언어는 유난히 낯설 것이다. 과학이라는, 중립적이어야 하는 지식이 급진적인 사유로 뻗어 나가는 과정이 불편한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낯섦과 불편을 감내하고, 폭력들을 헤엄쳐나갈 길고 깊은숨을 단련해보자. 돌고래와 물범이 그 옆에서 함께 헤엄쳐 줄 테니.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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